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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의 역사

대 덕 2025. 3. 19. 09:37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사마리아인은 사복음서에서 중요 집단으로 나타난다. 기독교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유대인과 다른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이 같은 민족이지만 뿌리 깊은 갈등이 있는 것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도 같은 민족이며 뿌리 깊은 갈등의 역사를 가진다. 그들의 갈등과 민족적 동질성이 복음서에 나타나지만 파악하기 힘들다.

1. 사마리아의 의미
사마리아의 의미에 대한 주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한 부족집단의 이름이 사마리아인이었는데, 그들이 한 곳에 정주하면서 그 주거지가 사마리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사마리아인의 의미는 <율법의 안내자/수호자/감시자>이다. 많은 기독교 교부들과 탈무드 주석이 이 설을 지지한다. 둘째 이론은 사마리아는 지역 이름이었으며, 나중에 그곳 거주민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고대에 파수꾼들은 사마리아 지역의 산에서 이집트 군사가 접근하는 것을 살폈다. 따라서 사마리아는 <보다(watch)>를 의미한다.

사마리아 신전의 폐허(1881-4), 유월절 예배를 위해 그리심산 앞에서 기도하는 사마리아인(1920)

2. 사마리아인의 기원

1) 사마리아인의 주장
사마리아인의 주장에 의하면, 사마리아인의 조상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이고,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갈라진 시기는 가나안 땅 정복 초기이다.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모세가 사막에 세웠던 이동 성막을 실로가 아니라 그리심산에 세운다.(구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실로에 세운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은 후, 제사장 엘리는 그리심 산을 떠나, 실로 언덕에 다른 성막을 세운다. 따라서 그리심산이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성소이다. Abu l-Fath가 14세기에 쓴 주석을 보자.

엘리가 비느하스의 아들과 전쟁을 벌였다. 왜냐하면 엘리가 그에게서 대제사장을 탈취하려 했기 때문이다. 엘리는 소금 없이 희생제물을 제단에 바쳤으므로, 하나님이 희생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느하스의 아들은 엘리를 비난했고, 엘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엘리는 추종자들과 실로로 가서 신전을 건설했다. 이스라엘 자손은 비느하스파(사마리아인)과 엘리파(유대인)로 나뉘었다.

위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정통 후손이며, 유대인은 반역한 엘리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2) 유대인의 주장
사마리아인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한 후 발생한다.

열왕기에 의하면,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이스라엘 사람을 강제 추방하고,
아시리아인을 북이스라엘로 이주시켜 이방의 종교가 북이스라엘에 정착한다.

역대기는 아시리아인의 정착을 말하지 않으며, 이자크 매건은 역대기가 사실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라바(기원후 300-500의 문서)는 사마리아인을 잇사갈의 자손으로 기록한다.
사해문서는 당시의 북 이스라엘 주민을 바보 또는 대적자로 언급하나, 이방인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3) 고고학 유물
사마리아인의 기원에 대한 기록은 사마리아인의 주장과 다르고, 열왕기의 이야기와 많이 일치한다.

나는 사마리아 포로를 아시리아 중앙에 정착시켰다. .. 나는 아라비아의 사막의 주민을 강제로 사마리아에 정착시켰다.(사르곤 2세 비문)
나는 27,289명의 사마리아 포로를 사로잡았다. 나는 중앙 아시리아에 그들을 정착시켰다. 또한 나는 내 손으로 정복한 나라의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다.(님루드 돌기둥)

그리심 산의 고고학 발굴은 사마리아 신전이 기원전 5세기 전반기에 그곳에 건축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고고학자 제달은 721년에서 647년 사이에 외국인이 세 번 사마리아로 유입되었다고 논한다. 다른 학자는 분리 시기를 유다인의 바빌로니아 유배 후로 추정한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분열 시기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원전 4 세기 초에 두 공동체는 분명히 구분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4)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유전적 관계
사마리아인 공동체에 대한 유전학적 조사가 1960년대에 실시되었다. 2004년 한 논문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공동 조상을 제안했다. 고고학자 Aharoni 등의 판단에 따르면, 아시리아는 민족적 동질성을 말살하기 위해, 기원전 734–712 사이에 외국인을 이스라엘에 강제 정착시키고, 이스라엘 내국인을 국외로 추방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과 해외에서 이스라엘인과 외국인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이 시나리오가 사마리아인, 이스라엘인, 이라크 유대인, 이스라엘 아랍인의 유전적 연결을 설명한다.

3.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마리아인의 역사
이스라엘 민족의 통일왕국은 북왕국(이스라엘)과 남왕국(유다)으로 갈라졌다. 북왕국의 마지막 수도는 사마리아였고, 남왕국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었다. 기원전 720년 아시리아가 북왕국을 점령한다. 많은 북왕국 사람들이 국외추방 당하고, 많은 외국인이 북왕국 지역에 강제 정착당했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북왕국 지역에서 혼합되었다.

기원전 587년 남왕국은 멸망하고, 예루살렘 신전이 파괴되었다. 유다의 왕족, 고위 관료, 제사장, 평민 상당수가 바빌로니아로 추방된다. 그들은 바빌론에서 공동체로 살면서, 고유한 민족성을 지키며 외국인의 혈통과 섞이지 않았다.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로니아 제국을 점령하고, 키루스 대왕은 유다인의 귀국과 신전 재건을 허락한다. 기원전 539년 추방된 유다인의 후손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유다인은 사마리아인과 갈등하기 시작한다.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 보면, 남왕국 유다의 멸망에도 북쪽의 사마리아인은 계속 자기의 땅을 지켰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이스라엘 조상의 종교를 보존한 참 이스라엘인이다. 귀환한 유다인이 가진 성서는 에스라가 변경한 성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짓 오경과 변경된 종교를 들여왔다. 따라서 그리심 산이 신성한 성소이며, 예루살렘은 신성하지 않다.

귀환한 유대인은 북쪽 지역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잃고 혼합되었다. 이주한 외국 민족이 원주민인 북 왕국 사람들과 결혼했다. 게다가 국가적으로는 야훼를 믿지만, 이주한 각각의 외국 민족은 본국의 관습에 따라 자신들의 신도 믿는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다양한 민족/종교로 혼합된 사람들일 뿐이다. 혼합 종교, 혼합 민족의 사마리아인에게 예루살렘 건설에 참여할 합법성은 없다.

세스바살(기원전 538 년)이 재건하기 시작한 예루살렘 신전은 스루바벨과 예수아를 거쳐, 학개와 스가랴가 515 년 완성되었다. 스루바벨 시기에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의 신전 건설을 도와주려 했으나, 유대인은 도움을 거절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더 멀어졌다. 마침내 사마리아인은 그리심 산에 자신들의 신전을 건설했다. 유대와 사마리아 종교지도자 모두 상대 집단과 접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상대 지역에 들어가거나 서로 말하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가르쳤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페르시아 시대 동안 주기적으로 싸웠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했다. 그가 죽고 알렉산더의 제국은 4개로 갈라졌다. 그중 하나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는 유대 지역을 헬레니즘화하려 했다. 그는 자신이 제우스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경배하라고 명령하면서, 경배하지 않는 사람에게 형벌을 가했다. 마카베오 반란이 일어났다. 사마리아인은 안전을 위해 유대인과의 모든 관계를 부인했다. 요한복음 4:9은 이 단절을 보여준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관계가 없다.” 마카베오가가 셀레우코스 왕조를 물리치고, 하스몬 왕조를 세웠다. 113년경 하스몬의 존 히르카누스는 사마리아를 유린하고, 사마리아 신전을 파괴했다.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발생했다.

신약성서 시기의 로마는 둘 사이의 긴장을 이용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기원후 1 세기 전반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종종 서로에게 폭력을 가했다. 기원후 1세기 초기에 사마리아는 4두정치의 헤롯 왕국의 일부가 되고, 중반에 로마-유대 지방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심의 사마리아 신전은 로마에 대항한 바코바 반란이 일어난 뒤 기원후 136년에 재건되었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제노는 사마리아인의 개종을 요구하고, 거절한 많은 사마리아인을 죽이고, 사마리아인 회당을 교회로 바꾸었다. 제노는 그리심 산을 강탈하고, 여러 건물을 건축했으며, 건물 사이에 아들의 무덤을 만들고,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 사마리아인이 예배할 때, 십자가에 절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484년 사마리아인은 폭동을 일으켰다. 제노는 그들을 진압하고, 사마리아인의 그리심 산 출입을 금지했다. 529년 사마리아인들은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사마리아인은 수만 명이 죽거나 종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사마리아인의 신앙은 불법이 되었다. 무슬림이 팔레스타인을 점령 시기, 오토만 제국 시기 등, 19세기까지 사마리아인은 박해와 개종요구를 잇따라 받았다. 19세기에 사마리아인은 100명 이하가 되었다. 2017년 1월 사마리아인은 796명이었다.

4. 사마리아인의 종교
사마리아인의 오경과 유대인의 오경은 매우 유사하지만, 교리적 면에서는 중대한 차이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려고 선택한 장소는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이고, 사마리아인에게는 그리심산이다.
아브하람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소도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이고, 사마리아인에게는 그리심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