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용어자료

기독교 용어해설

대 덕 2025. 5. 29. 07:08

1.근본주의
2. 복음주의
3. 자유주의.
4. ​보수주의

1 근본주의Fundamentalist Christianity

(1). 기독교 근본주의의 신앙노선
기독교 근본주의의 신앙노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
둘째,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믿는다.
넷째,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믿는다.
다섯째,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
여섯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무오한 것을 믿는다.

(2).**기독교 근본주의의 출발**
이상은 기도교인이면 어느 누구도 의심없이 믿고 또 믿어야 할 신앙의 근본이다. 사실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상의 진리를 믿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본주의에 오염된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신자들은 이런 기독교의 근본까지 부인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런 진리를 믿지 않는다. 자유주의에 의하여 기독교의 근본이 유린되는 상황을 염려하던 보수주의자들은 1895년 나이아가라 폭포에 모여 근본주의라는 이름을 낳게 될 기독교의 근본 신앙 5가지를 채택하여 Fundamentals라는 명칭을 달아 발표하게 되었다. 이때 발표된 것이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무오한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역사적 사실이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다.
셋째,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믿는다.
다섯째,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
이런 기독교의 기본 요소들이 자유주의의 득세로 부인되거나 배척을 받는 상황에서 채택되었다.

그후 자유주의의 득세를 실감하면서 미래의 기독교를 염려하고 고민하던 미국 장로교 총회는 20세기에 들어와 자신들의 신앙노선으로 이상의 근본주의 신앙을 채택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의 비평
자유의자들은 성경을 두 가지 형식으로 헐어가고 있다, 첫 번째는 성경 저자의 문제인데 이것을 고등비평이라 한다. 두 번째는 성경본문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역사적 기독교의 주장을 근본에서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들이 제기하는 저자 문제 중에 가장 첫 번째로 거론되는 것은 모세 5경이 모세의 저작이 아니는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그 시대에 있었던 많은 문서들을 종합하여 기록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더욱이 그들이 지적하는 부분 중 신명기 34장에는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어찌 자신의 죽음을 자신의 손으로 기록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세 5경 전체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시되기에는 너무 지나친 비약이다..

더욱이 초대교회에서 지금까지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입장은 모세 5경을 모세의 저작으로 믿고 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모세의 책 중에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막 12:26)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모세 5경을 모세의 저작으로 믿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그들은 성경이 목적영감설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 하기도하지만 정통적인 장로교의 입장은 성경은 유기적인 영감설에 의해 기록되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디모데후서 3:16).

2. 복음주의 Evangelical Christianity**.**
한 때 변두리 운동과 지엽적 현상으로 여겨졌던 복음주의가 기독교의 주 세력권으로 진입하고 있다. 지류에서 성장하던 복음주의가 본류로 이동하여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려는 것이다. 아무도 이제 복음주의가 세계 기독교의 중심 요소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자유주의 교회는 침체 속에 있는 반면, 복음주의 교회는, 성장과 확장을 거듭해왔다.

복음주의는 획일성을 지닌 하나의 실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다양성을 지닌 운동이다. 어떤이는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자기 것만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하고, 그와 다르면 비복음주의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복음주의나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다. 고대 교회 공의회, 루터, 칼빈, 침례파, 웨슬레의 교훈 아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복음주의자에 속한다. 복음을 믿는 자는 모두 복음주의자며, 복음에 기초한 신학은 모두 복음주의 신학이다. 복음주의 신학이 아니면서 기독교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에 대한 이런 일반적 이해는 복음주의 정체성 해명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복음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 곧 복음주의에 대한 증명과 보증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기독교와 기독교인 모두의 특징이기도 하다.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그 의미가 다양하여,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그치지 않는 개념이다.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미국 종교사 편찬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로 취급된다. 논란이 되는 것은 복음주의를 정의해야 되느냐 또는 기술해야 되느냐, 신학적으로 정의하느냐 또는 정서적으로 정의하느냐, 그것이 신학이냐 아니면 운동이냐 하는 문제 등이다. 복음주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으나, 이론의 여지 없는 통일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주의 신학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아직도 논의되고 있다. 따라서 현대 복음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긴급한 문제는 정체성의 위기다.

데이턴(Donald W. Dayton)은 복음주의란 용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그 유용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복음주의는 어떤 신학적 신념들에 기초한 영적 갱신과 부흥 운동이다. 역사적으로 복음주의란 말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복음주의 신념은 무엇인가, 복음주의 운동이란 어떤 것인가, 현대 복음주의 흐름은 어떠한가? 이 물음들은 다시 한가지로 압축된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1).**복음주의의 의미**
복음주의는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신학적 현상과 부흥운동이다. '복음적'이란 말은 한 가지 의미가 아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이단적인 것에 반(反)하여 정통적인 것, 로마 가톨릭 교회적인 것에 반(反)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적인 것, 그리고 현대적 또는 자유주의적인 것에 반(反)하여 전통적 또는 보수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 개신교 내에서도 여러 그룹이 복음주의란 용어를 명확한 기준 없이 자신들의 입장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복음 자체를 강조하는 표현이며,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한 말이다 복음주의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알려진 것을 의미하며, 복음주의 신학은 복음서의 하나님, 즉 예수의 생애와 그의 교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초점을 둔 신학을 말한다. 복음주의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은총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복음에 헌신하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주의란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복된 소식, 즉 복음을 보존하고 선포하려는 기독교의 역동적 운동의 중심 취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맥그라스에 따르면, 그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그것은 중세 말기 교회의 형식적 신앙에 반기를 들고 성서적 신앙 회복을 주창했던 가톨릭 저술가들을 가리키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개인적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는 복음적 태도는 이미 15세기 후반 이태리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그리고 그것을 중시하는 영적 운동은 1520년대 이태리 귀족사회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복음주의 운동의 초기 형태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복음주의는 루터교적이며 반(反)가톨릭 교회적인 것을 의미했다. 독일에서 그것은 프로테스탄트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16세기 중엽, 가톨릭교회는 루터교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칭의의 교리에 근거하여 개인적 신앙과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루터의 복음주의적 신앙태도를 정죄하고 금지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는 반 가톨릭교회적 루터교인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는 복음주의자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렀으며, 17세기 중엽 그것이 일반화되고, 복음주의자와 프로테스탄트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현대에 들어, 복음주의는 두가지 의미, 즉 넓고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는 18세기 대 각성운동으로부터 일어난 신앙전통을 말하고, 좁은 의미는 그 하부 구룹인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사용되는 명칭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의 차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1942년 미국에서 오켄가(Harold John Ockenga)의 지도로 조직된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의 창립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NAE는 엄격한 근본주의자들 보다 오히려 온건한 복음주의자 구룹이었다. 흔히 신복음주의로 알려진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는 헤렐드 오켄가, 칼 헨리, 빌리 그래함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은 극단적 근본주의자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신복음주의란 용어를 사용했다. 최근에는 신복음주의란 용어 대신, 간단히 복음주의란 용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요약하면, 복음주의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항상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복음주의는 어느 한 교파나 신학노선에 국한되지 않고 초교파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루터주의, 칼빈주의 그리고 알미니안주의, 비교화적인 근본주의자와 유식한 루터파 혹은 개혁파 신학자, 그리고 오순절주의자와 신정통주의자 등을 포괄하기에 충분한 큰 개념이다.

(2).**복음주의의 신념**
복음주의에 대한 해명 방법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규정하는 것(defintion)과 기술하는 것(description)이다. 규정 방법은 복음주의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를 근본주의나 세대주의와 동일시하는 것, 성서 무오성 또는 베이컨의 인식론에 대한 헌신으로 간주하는 것, 복음주의자라는 명칭을 미국 부흥운동의 후손들이나 현대사상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 복음주의를 개혁파나 어떤 특정 관점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또는 축소적(reduction)정의로 불린다.

이 방법은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데 그 난점이 있다. 복음주의는 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토대로 세계 기독교의 다양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이런 기원의 복합성 때문에, 그것을 한마디로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자들은 하나 같이 그 정의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스위트(Sweet)는 복음주의란 용어는 정의를 피한다고 말하고, 크라우스(Kraus)는 "복음주의 운동은 정확한 신학적 정의를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복음주의가 역사적으로 결코 지닌바 없었던 신학적 획일성이나 균일성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기술의 방법이다.

기술 방법은 다양한 복음주의의 특징이나 경향 또는 중심 요소에 근거해 복음주의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복음주의를 신학적 체계로 보는 것과 역동적 운동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가 신학적 또는 교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역사적, 정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복음주의를 종교적 조직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미국 역사학자 말스덴(George Marsden)이 지적한 복음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세가지 중복적 영역에서도 확인된다. 첫째, 복음주의는 개념적 통일체를 의미한다.

복음주의자는 전형적으로 다음 사실을 강조하는 자들이다. 성서의 궁극적 권위에 대한 종교개혁 교리,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역사성, 그리스도 신앙을 통한 영원한 구원, 전도와 선교 및 영적 변화의 중요성. 둘째, 복음주의는 역동적 운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음주의를 공통적 유산과 공통적 경향, 유기체적 성격을 지닌, 역동적 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교단들, 전도 단체(para-church), 그리고 복음전도 지향적 운동들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복음주의는 종교 단체를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공통체 속에 공통 유업과 관심사를 결합하는 자들의 초교파 그룹 및 모임이다. 1846년에 영국에서 창립된, [복음주의 연합] (the Evangelical Alliance)과 1942년 미국에서 창립된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E)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교리적 접근에 의해 복음주의를 기술하고 있는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복음주의의 특징을 밝혀보자. 막크 놀(Mark A. Noll)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에서 복음주의를 초자연적 중생의 필요를 강조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고백하며 선교와 전도를 통해 복음전파를 촉진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지적했다. 앤더슨(Ray S. Anderson)은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독특성을 세가지 관심, 즉 정통주의 교리, 성서의 권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체험에 대한 관심에 의해 표현했다.

맥그라스는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인정하고,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복음주의에 통일성을 가져다 주는 공통된 특징이 확신에 기초무엇인가를 기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복음주의는 크게 여섯가지의 지배적 견해가있다. 성경이 가지는 최고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 성령의 주권,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 복음 전도의 우선권,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 이 여섯가지는 복음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특징인 동시에 그 토대가 된다.

웨보르그(John Weborg) 역시 복음주의란 용어를 정의가 아닌 기술로 간주하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네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구원된다. 둘째, 세계의 소망은 역사의 종말에 있게 될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있다. 셋째, 성경은 삶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넷째, 인간은 복음의 능력에 의해 중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죤스톤은 현대 미국 복음주의의 공통점을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개인적 신앙을 통한 복음에의 헌신, 복음에 대한 성서적 이해 그리고 전도와 사회개혁을 통한 복음전파이다. 복음주의자는 "복음이 개인적으로 체험되고, 성서적으로 정의되고 열정적으로 전파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이다.

올만(Ohlmann)은 복음주자들의 공통점으로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 개인적 종교와 종교적 체험에 대한 강조 종교적 자유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성서의 권위에 대한 강조를, 그리고 스태플스(Staples)는 선교와 전도, 성서적으로 기초된 복음, 기독교적 도덕 가치에 대한 깊은 헌신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스태플스는 복음주의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공동체라고 믿는다.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이 복음주의자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에스큐(Thomas Askew)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인정하는 복음주의의 특징으로 네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성서는 신앙과 실천을 위한 유일한 권위다. 둘째, 회심은 크리스챤 생활의 시작에 필요한 개인적 체험이다. 셋째, 영성과 성결은 의식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넷째, 전도와 교회 개혁의 사명은 크리스챤의 의무다.

블로쉬(Donald Bloesch)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자들을 흐트려뜨리려는 원심력이 있는 동시에, 함께 끌어들이려는 구심력 있다고 주장한다. 그 구심력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복음 전파의 공동목적에 놓여 있다. 파크레(Gabriel Fackre)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Wes 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에서 복음주의자는 개인적 회심과 엄격한 도덕 생활을 강조하는 자, 신앙과 실천에 대한 지침으로서 성경에 관심을 집중하는 자 그리고 특별한 열정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상에서 복음주의 특징에 근거하여 복음주의 의미를 밝히려는 학자들의 노력을 살펴 보았다. 그것을 정리하면, 복음주의 주 요소와 특징은 몇가지로 요약된다. 영국 역사가 배빙톤(David Bebbington)이 지적한바와 같이, 회심주의(conversionism), 성서주의(biblicism), 활동주의(activism), 십자가 중심주의(crucicentrism)이다. 회심주의는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중생을 강조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개인적 회심과 체험적 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성서주의는 성서를 궁극적 권위로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는 복음주의 전통의 본질적 요소다. 활동주의는 복음전파에 관심을 두는 것을 말한다. 복음주의는 복음전도의 우선권을 두고 전도와 선교를 강조한다. 십자가 중심주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한 구속사역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3).**복음주의 운동**
복음주의는 성서의 메세지로부터 유래한 신학체계인 동시에, 기독교에서 일어난 독특한 운동, 즉 경건하고 헌신적인 신앙 풍토다. 그것은 항상 신앙운동과 일시적으로 체휴하며 형성되었다. 종교개혁 운동, 경건주의 운동, 청교도운동, 대각성운동, 부흥운동, 근본주의 운동, 성결운동, 은사운동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신학의 역사를 통해 복음주의를 기술하고 있다.

복음주의 규범적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편, 복음주의를 신학으로 본다면, 서방 기독교, 종교개혁신학,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맥을 계승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운동으로 본다면, 그것은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주요 운동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부흥운동 등이다.특히 그랜즈는 [복음주의 신학의 갱신]에서 복음주의가 같은 중심을 축으로한 세 원을 통해 일어났다고 본다. 큰 원이 종교개혁이라면, 중간 원이 청교도와 경건주의 운동이고, 작은 원이 탈 근본주의, 즉 신복음주의 운동이다.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및 경건주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복음주의 의미를 논의해보면. 현대 복음주의의 첫번째 역사적 원천은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복음의 본질을 재천명한 복음주의 운동이다. 종교개혁 시대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복음에 대한 루터의 신앙을 강조하며 자신들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음주의적(evangelisch)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그렇지만 루터가 복음주의란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 종교개혁과 현대 복음주의와의 특별한 관계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로테스탄트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이며,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은 복음주의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과 현대 복음주의 관계는 그런 외형적인 것이 아닌, 내면적인 것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중심 주제들이 복음주의 운동의 근원과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종교개혁의 표어,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가 복음주의 정체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종교개혁은 복음주의의 초점과 표준이 되었다.

종교개혁이 복음주의 운동의 뿌리요, 정체성의 주요 요소이기는 하나, 그 전 지평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운동은 교회 개혁에 주 관심이 있었고, 불신자를 회심시키는 복음전도와 선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반면, 복음주의는 교회 개혁 보다는 회심과 복음전도에 더 관심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을 죄와 용서라는 법적인 면에서 이해한 반면, 영미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을 통한 내적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현대 복음주의의 두번째 역사적 원천은 17세기 청교도 운동이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은 청교도운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며, 현대 복음주의자들 역시 청교도들의 후예들이다. 웨슬레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서적목록에 많은 청교도 작가들의 저작들을 포함시켰다. 청교도운동은 영국교회 갱신운동이었다.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이 불완전하다고 평가하고 온전한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은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신약성서적 교회의 회복을 모토로 삼았다.

청교도운동은 건전한 신학과 윤리적 삶에 관심을 두는 이론적이고 도덕적인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청교도들이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청교도들은 개혁파 교회의 지적 성향과 그리스챤 삶의 경험적 측면을 함께 강조했다. 청교도 운동은 칼빈주의의 선택의 교리에 의해 일어난 불안에 대응해 새로운 종류의 경건을 발전시켰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이란 용어로 개인의 구원문제를 표현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옹호했으나, 선택된 자로 확신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다.

반면, 청교도들은 선택의 명확한 표준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구속 은총에 대한 내적 경험이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의 주관적 증표인 중생의 체험을 강조했다. 즉 형식적 신앙을 반대하고, 체험적 신앙을 주장했다. 미국의 초기 청교도들이 은혜 체험을 고백하는 사람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복음주의가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강조하며, 그것이 그 중요한 특징이 된 것은 청교도운동의 영향이었다. 또한 청교도운동은 복음주의에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기독교 국가 건설의 환상을 제시했다. 그렌즈에 따르면, 복음주의적 영성은 청교도운동에서 기원된다. 복음주의가 주로 영어문화권에서 성장, 발전한 것은 청교도운동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이 청교도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8세기에 요나단 에드워드의 목회와 저작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그를 중심한 대각성운동과 종교체험에 대한 그의 해석은 복음주의 운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복음주의의 세번째 원천은 경건주의 운동이다. 독일 경건주의는 사상의 체계라기 보다 감정의 체계이며 신학적 분위기와 종교적 부흥운동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신교는 종교 개혁의 생명력 있는 신앙을 상실하고 형식화, 교리화되었다. 특히 루터교 정통주의는 "따뜻한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하나의 이론 체계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경건주의이다. 경건주의의 근본 목적은 엄격한 형식과 교리에서 벗어나 생동감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의인, 중생, 성화는 교리로만 취급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해야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지식 보다 오히려 실천에서 존재한다. 경건주의자들의 주 관심은 개인적 신앙, 즉 자신들의 영혼 구원에 있었다. 웨슬레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경건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한 전형적 실례이다.

경건주의는 기독교란 신념의 체계일뿐만 아니라 일종의 삶이라는 진리를 재발견하며, 형식화된 정통주의 기독교에 활기를 불어넣는데 공헌했다. 그것은 생명력 있는 개인적 종교에 대한 욕구를 육성했다. 독일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복음주의가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의 또 다른 원천은 부흥운동이다. 부흥운동은 독일의 경건주의,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운동 및 각성 운동 등에 의해 18-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신앙운동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적 신앙을 강화하는 영적 각성 물결이었다. 부흥 및 각성운동의 특징은 회심 체험, 경건하고 성결한 삶, 교회갱신, 노예제도 폐지와 인권향상 등 사회개혁, 봉사와 선교 등을 강조한 것이다.

172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제1차 각성운동은 1740년대 요나단 에드워드와 죠오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설교를 통해 그 절정에 달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요한 웨슬레와 그의 동생 챨스 웨슬레(Charles Wesley)를 통해 영국교회 갱신운동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미국에서 에즈베리(Francis Asbury)에 의해 계승되었다. 제2차 각성 운동은 19세기 초 찰스 피니(Charles Finney)등의 주도로 미국에서 일어났다.

19세기 초 미국 복음주의의 특징은 부흥운동을 발전시킨 것과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한 것이다. 부흥운동과 국교분리의 결합은 미국 교회에 활력을 가져다 준 반면, 실용성에 대한 관심이 원리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리의 문제를 실용의 문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대 각성운동은 복음주의를 19세기 미국 교회의 지배 세력으로 부각시켰으나, 동시에 개인적 종교 경험과 지성적 엄격성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긴장을 일으켰다.

현대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및 부흥운동의 산물이다. 이 운동들은 복음주의에 근본 토대와 기반을 형성했다. 한편 복음주의 운동은 현대 초기에 태어나 20세기 중엽 성숙에 이르렀다. 복음주의는 과학적 사고, 경험적 접근 및 상식주의에 같은 현대의 도구를 항상 사용하고 있다.

(4).**복음주의의 흐름**
복음주의는 획일성을 지닌 실체가 아니라 다양성을 지닌 신학적 신념이요 운동이다. 복음주의는 만화경, 모자익, 또는 우산으로 표현될 만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머어피(Cullen Murphy)는 복음주의 신앙을 12개 기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천막으로 비유했으며, 웨버(Robert Webber)는 복음주의 내에 14개 소 구룹을, 그리고 데이턴과 존스턴이 편집한 [미국 복음주의의 다양성]은 복음주의 내에 12개 신학전통을 포함하고 있다. 맥그라스에 따르면, 이러한 다양성은 복음주의 신념들에 대한 강조의 차이, 그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문제 그리고 기타 강조점 첨가문제로 일어난다.

현대 복음주의의 유형은 학자들에 따라 3, 4, 혹은 6개로 분류된다. 가브리엘 패커는 현대 복음주의를 분열된 제국으로 비유하고, 그것을 6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근본주의, 구 복음주의, 신복음주의, 정의와 평화 복음주의, 은사적 복음주의 및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완전 무오성을 신앙적 신실성의 표준으로 간주하며, 논쟁적이고 분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구 복음주의는 신앙의 체험적 측면에 우위권을 두며 개인적 중생 체험과 대중적 복음전도 운동을 강조한다. 신복음주의는 신앙의 사회적 의의와 변증적 설득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정의와 평화 복음주의는 활동적 복음주의로 급진적 정치적 견해를 주장한다. 은사적 복음주의는 성령과 그 사역, 방언, 치유, 축제 형식의 예배를 강조한다. 에큐메니칼 복음주의는 광범위한 기독교 공동체와 관련을 맺는데 관심이 있으며, 공통 사회적 관심사를 위해 주류 교단들과 협력한다.

웨버(Timothy P. Weber)는 4개의 가지를 지닌 복음주의 가계도(family tree)를 제시했다. 고전적, 경건주의적, 근본주의적, 그리고 진보적 복음주의다. 고전적 복음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교리, 즉 성서의 궁극적 권위, 믿음에 의한 칭의, 대속 등에 충실하다. 따라서 고전적 복음주의자는 신학에서 종교적 경험 보다 교리의 역할을 중시하는 신조주의자다. 대륙의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그리고 19세기 구파 장로교(Old School Presbyterianism)가 여기에 속한다. 경건주의적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전통에 경건주의, 청교도운동 그리고 18세기의 대 각성운동의 경험적 강조점을 결합시킴으로써 그것을 완성하려고 한다.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자는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회심 및 거룩한 삶을 강조하고, 부흥, 사회개혁, 고상한 삶을 촉진하는 종교적 실용주의자이다. 19세기 대부분의 복음주의 체제들, 즉 감리교인들, 침례교인들, 오벌린 완전주의자들(Oberlin Perfectionists), 신파 장로교인들(New School Presbyterians), 성결 구룹과 오순절운동이 여기에 속한다.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자-현대주의자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것은 고전적 그리고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특징 중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으나, 그 중 소수의 근본적인 것들에 촛점을 둔다. 근본주의자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출현한 신복음주의자가 여기에 속한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현대 의식을 가지고 정통주의 기독교 요소들을 유지하려고 한다. 성서의 무오성과 성서비평주의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시대적 필요에 따라 근본주의를 개혁하려고 하는 일부 신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적 분리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주류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데이턴은 복음주의자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된 개신교 역사을 주목하고, 복음주의를 세 유형, 즉 프로테스탄트/루터란 복음주의, 부흥운동적 복음주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로 구분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종교개혁 시대, 기독교 신앙에 성서적, 그리스도 중심적 표현을 부여했다. 18-19세기 미국의 대 각성과 부흥운동 기간 회심을, 그리고 20세기 근본주의자/현대주의자 논쟁 기간 정통주의와 보수주의적 가치들을 강조했다.

바레트(David Barrett)는 [세계 기독교 백과사전](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서 복음주의를 세가지 형태로 나누었다. 근본주의자, 보수적 복음주의자, 신복음주의자이다. 근본주의자는 그 창립정신을 고수하고 기독교의 일곱가지 근본 교리를 주장한다. 성서의 무오와 문자적 영감설, 동정녀탄생, 그리스도의 기적들, 육체의 부활, 인간 존재의 전적 타락, 대리적 속죄, 천년왕국 이전의 재림 교리이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는 근본주의의 내용을 고수하기 원하나 보다 개방적이고 비판적 형태를 원한다.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자 또는 신복음주의자는 교회 일치와 협력에 개방적이며, 세계교회 협의회와 미국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성서의 제한적 무오성을 확신한다.

웨버의 견해는 복음주의 흐름 이해에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패커의 분류는 더 압축될 수 있는 반면, 바레트나 데이턴의 분류는 복음주의의 현황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20세기 이전의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적 복음주의와 청교도운동, 경건주의운동, 부흥운동에 토대를 둔 경건주의적 복음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여기에 20세기 초반 복음주의를 대표했던 근본주의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근본주의를 개혁하려한 신복음주의 또는 진보적 복음주의를 첨부할 수 있다.

(5).**근본주의와 복음주의 또는 신복음주의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근본주의는 19세기 미국의 두 신학 조류인 프린스톤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 전선을 펴고 일어난 신학운동이다. 근본주의는 특히 1920-40년대 사이 미국 개신교권 내의 한 운동을 말한다. 그것은 현대주의 도전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정통주의 기독교 신앙의 근본 요소들을 재확인하고 재천명한 것이다. 그 기본 정신은 저항주의와 분리주의로 요약된다. 그것은 반문화적 운동과 기존 교단으로부터의 분리로 표현되었다. 근본주의의 주 관심사는 바른 교리였다. 근본주의는 교리 중심의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흐름을 차단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보존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반면, 사회적 비젼을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하고, 기독교 복음의 한 측면만을 강조했다. 근본주의는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며, 반지성적, 비교화적이어서 교육받은 대중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1940년대에 근본주의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출현한 것이 신복음주의다. 미국의 근본주의 안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성적 표현을 추구하는 젊은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헤롤드 오켄가, 칼 헨리, 빌리 그래함 등이다. 그들은 개신교 정통 교리를 유지하면서도, 학문적 연구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가졌던 온건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신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주류의 입장을 회복하면서 특히 세상을 긍정하고 문화를 포용하는 복음주의적 비젼을 지니고 있었다. 신복음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문화를 변혁시키는 복음에 대한 비젼을 회복한 것"이다. 신복음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서구에 복음주의의 새로운 부흥이 일어났다. 최근 신복음주의란 명칭은 간단히 용어인 복음주의로 대체, 사용되고 있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는 신학 보다는 그 양태(style)에 있다. 양자는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신학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성서의 영감과 절대 권위에 대한 확신, 그리스도의 유일성 , 체험적 신앙, 세계 선교, 현대신학에 대한 불신 등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 그러나 교리적 관심을 추구하는 방법에서 복음주의자는 보다 지적이고 개방적이었다. 복음주의는 자유주의 보다는 보수적이나, 근본주의 처럼 보수적이지는 않다.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중간 길을 택하는 제3의 세력을 말한다.

복음주의의 흐름은 역사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 17-19세기 청교도, 경건주의 및 부흥운동, 20세기 전반의 근본주의 그리고 후반의 신복음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이 흐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모든 복음주의의 조류는 신학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정통 교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성서의 궁극적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성,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신앙에 의한 구원, 회심을 통한 성결과 전도에 헌신적인 삶이다.

한편,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주장하거나 강조한다고 해서 모두 복음주의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주의 신학을 독특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정통주의, 성서적 권위 또는 크리스챤 경험에 대한 독점적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복음의 본질적 요소로, 신앙 고백으로 그리고 전도와 세계 선교에 대한 명령으로 표현하는 열정적 관심이다. 종교개혁적 신학개념과 갱신 및 회심의 정신이 결합되어야 복음주의적이 되는 것이다. 부흥과 갱신의 역동성이 복음주의의 본질적 특성이다.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교리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경건주의적 복음주의는 감정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주의를 신학적 신념이나 교리로 간주하는 것과 신앙운동과 정신으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복음주의 전통의 양면 중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대 복음주의는 신학인 동시에 운동이다.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신념에 토대를 둔 영적 부흥 및 갱신운동이다.

결 론
복음주의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서구 세계, 특히 북미에서 큰 부흥을 이룩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주의의 영적 호소력과 낙관주의적 사고에 매료되고 있다. 정통 기독교 교리를 신봉하고, 복음전도에 헌신적인 것이 복음주의 매력이요 장점이다. 현대복음주의는 활동적이고, 대중적이며 실용적인 것이 특색이다. 현대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중간 길을 택하는 제3의 세력을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복음에 가해질 해악을 간과하고, 현대인이나 문화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복음을 변조시킨 것이다. 이런 급진적 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동시에, 극단적 보수주의, 즉 근본주의의 신학적 폐쇄성으로부터 자유한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중요한 업적이다.

한편, 복음주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지성적 빈곤이다. 복음주의는 폭 넓고 심오한 지성적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비판적 분석과 진지한 성찰 보다, 문제들을 단순화하거나, 영감과 은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세대주의, 근본주의, 케직운동, 오순절주의 등은 복음주의 생존 전략들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을 보존하는데는 성공했으나,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지닌 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대중적 차원에서는 큰 성과를 이룩했으나 지성계나 문화계 상류층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제2차 대전을 깃점으로 근본주의가 쇠퇴하고, 복음주의가 부흥되는 과정에 교리 문제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고 있다. 그것이 복음주의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한 주요 원인 중 하나다. 복음주의의 정체감을 보존하고 지켜 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은 복음주의 운동의 뿌리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그 명칭이 유래된 것이므로, 그에 맞게 복음 위에 서야 한다. 또한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부흥운동 등 그 계보와 역사 속에서 다양한 자원들을 발견하여 세로운 세기를 대비해야 한다.

현대 후기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를 필요로 한다. 한스 큉에 따르면 "교회는 근본이 없는 현대주의와 현대성 없는 근본주의 사이에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시대적 요구를 이상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복음주의다. 기독교의 미래는 복음주의 운동에 달려 있다.

3. 자유주의 신학
19세기 신학은 여러 부류로 세분될 수 있으나, 구라파, 특히 독일 신학계를 주도한 신학사조를 흔히 자유주의 신학, 신개신교 신학 혹은 현대주의 신학이라 한다. 이것은 1920년대까지 유럽 신학계를 그리고 1930년대까지 미국 신학계를 주도했다. 자유주의 혹은 현대주의는 그 안에 다양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의미는 “제한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사상 체계나 입장을 절대시하거나 그것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19세기의 모든 사상 즉 종교를 비롯한 과학, 철학, 경제, 정치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종교적 자유주의는 현대의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시대 정신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거나 재진술함으로써 기독교를 변호하려한 노력이었다. 19세기 들어 개신교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현대에서 종교가 어떻게 가능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이것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며 종교와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및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문제가 주 관심사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종교개혁 신앙을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다. 그러나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 (context)에 둠으로써 인간 중심의 신학이 되었다.

저자는 글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이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일어났는지 무엇을 주장하며 어떻게 발전하고 쇠퇴했는지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는 무엇인지를 해명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있다.

(1).**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배경**
사상은 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어떠한 배경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에 대한 개신교의 응답인 동시에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개신교는 18세기에 여러 측면으로 변화를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100년전쟁, 영국 시민 전쟁,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 전쟁과 같은 수많은 갈등과 투쟁이 일어났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가 출현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며, 사회 계급이 발생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여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와 조화하여 또는 계몽주의의 관점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려 했다. 계몽주의는 17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며 전 유럽 사상의 주류를 형성했던 사조로서 개인의 자유와 이성의 능력을 무한히 신뢰하고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 외에도 경건주의와 19세기 초의 독일 낭만주의가 자유주의 신학 형성에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으며 자유주의 신학이 성장하고 발육한 토양이 되었다.

계몽주의
버나드 램 (Bernard Ramm)교수는 [현대 신학에서의 긴장들 (Tensions in Contemporay Theology)] 이란 책에 수록된 그의 논문에서 계몽주의가 현대 정신과 신학에 미친 영향으로 일곱가지를 지적했다. 역사주의, 과학주의, 비평주의, 합리주의, 관용주의, 낙관주의, 및 칸트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계몽주의의 강조점인 동시에 특징들이다..

*역사주의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만을 진리로 인정하려는 사상이다. 이것은 성서의 역사적 자료에 대한 신뢰성과 사실성에 대해 계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자유주의의 발생을 촉진했다. 이것들은 사회 윤리 및 영적 가치를 결정하는 지금까지의 삶의 양태와 가치 기준을 변화시켰으며 성서적인 세계관과 과학적인 세계관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성서의 기록과 현대 과학이 충돌할 때 성서보다. 과학을 선호했다. 따라서 창조와 타락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는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자연세계에 대한 과학의 탐구 결과를 수용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탐구 방법을 신뢰하여 성서와 종교 연구에 사용했다.

*비평주의는 모든 사실과 자료들의 확실성을 의심해 보거나 분석 또는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성서 역시 재검사의 대상이 되었으며 고등비평이란 이름 아래 성서 비평이 시작되었다. 성서 비평은 기독교가 계몽시대의 새로운 학문과 학문방법에 적응해 보려는 시도였다.

*합리주의는 이성의 완전한 능력을 강조하여 이성을 최종적인 권위와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고 이성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 역시 이성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태도이다. 이 결과로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기적 등에 대한 교리들이 문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 파울루스 (Paulus)는 기적에 관한 성서의 기록들을 저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다. 예수가 물 위로 걸어가신 것은 제자들이 잘못 본 것으로 부활은 예수가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 소생한 것으로 승천 기사는 예수가 정말 죽기 전에 한 고별 인사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 합리주의를 신학에 도입하여 합리주의적 종교를 만든 것이 자연신론자들이다. 18세기의 자연신론과 자연종교는 종교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축소시킴으로써 합리주의와 기독교 신앙 사이의 타협을 모색했다.

*관용주의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계속성의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가 인간과 자연세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인간과 하나님의 연속성과 기독교와 타종교의 공통성을 주장하고 기독교를 다른 종교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도록 했다.

*낙관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미래를 신뢰하여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며 세계가 계속적으로 좋아지고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이것은 당시의 평화적인 분위기 급속한 산업화 민주적인 정치 구조 역사의 진행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 과학에 대한 신뢰 등에 기인되었다. 이런 낙관적 정신에 근거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원죄교리를 거부하고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칸트주의, 계몽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은 칸트의 비판철학이다. 칸트는 초자연적인 종교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단지 이성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종교만을 논함으로 종교를 도덕화시켰다. 이러한 칸트의 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할 정도로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트뢸치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자유주의 신학이 종교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은 칸트의 영향이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 과학의 발전 및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연구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최고의 권위로 믿는 정통주의적 성서관에 의문을 제기했다.

성서의 권위가 문제시 되자 그 변호자들은 진리의 보증으로 기적에 호소했던 반면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일상 사건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는 기적의 가능성을 자연질서의 규칙성에 대한 과학적 발견에 근거하여 부정했다. 이런 결과로 기독교 정통주의에 반대되는 자연신론과 자연종교와 같은 합리주의적 종교가 계몽시대에 발전하게 되었으나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에 계시나 복음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상실하게 되었다.

경건주의
18세기와 19세기 개신교 교회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또 다른 사상 운동이 경건주의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생명력 있는 신앙을 상실하고 형식과 교리화되었다. 성서의 권위가 약화된 반면 세례단, 설교단, 고백실 등이 무언의 우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경건주의이다. 경건주의는 사상의 체계라기 보다 감정의 체계이며, 신학적 분위기와 종교적 부흥운동이라 할 수 있다.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페너 (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자신의 집에서 기도와 성서 연구 및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자유스런 토론을 병행하는 모임을 가지는 한편 [복음적 교회의 개혁을 위한 열망 (An Earnest Desire for a Reform, Pleasing to God, of the True Evangelical Churches)] 이란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서의 진지한 연구 평신도의 교회 행정 참여 기독교인의 실천적 삶이 교리 지식에 대한 본질적인 보층물이라는 것. 이단자들에 대한 관대한 취급 대신 혹독한 공격과 처벌을 할것 대학에서의 기도와 경건 생활, 수사학적 설교를, 순수하고 신앙심 있는 설교로 대치할 것 등을 제의했다. 이러한 스페너의 호소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하나의 운동이 되었다.

스페너의 사후에는 프랑케 (August Hermann Franke, 1663-1727), 진젠도르프 (Graf Nicholas Zinzendorf, 1700-1760)등이 지도자가 되었으며, 프러시아 왕 프레드릭 Ⅲ세가 경건주의를 적극 돕고 1694년에 할레 (Halle)대학을 설립함에 따라 이 대학이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세력이 약화되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신경건주의가 일어 났으며 멘켄 (Gottfried Menken, 1768-1831)등이 이를 대변했다.

경건주의의 특징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했다. 의인 중생 성화를 교리로만 취급하지 않고 실제로 체험해야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지식보다. 오히려 실천에서 존재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둘째 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 행함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다고 비판 받을 정도로 선행을 강조했다. 셋째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종교의 개인화를 목적으로 삼았다. 경건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은 세계를 기독교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넷째 강력한 헌신생활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중시하는 친교의 원리를 강조했다. 지역교회 제도와 그 원리와는 달리 교회를 경건한 무리의 모임으로 간주하고 하나님과의 내적인 연합과 중생의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은둔하여 함께 더불어 사는 특수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건주의는 형식화된 정통주의 기독교에 생명력을 회복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으나 자신의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쏟는 개인주의적 신앙이 그 근본적인 결점이었다. 경건주의는 칸트 헤르더 슐라이에르마허 헤겔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9세기의 개신교 사상의 재구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자유주의 신학이 주관주의적이며 경험적이며 윤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경건주의의 영향이라 하겠다

낭만주의
18세기를 지배하던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우주관을 거부하는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 1790년대 루소와 레씽에 의해 독일에서 시작되어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 문학 과학 등 여러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낭만주의가 그것이다. 낭만주의 운동은 형태와 동기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란 말 역시 너무 자유스럽게 사용되므로 통일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헤론 (Alasdair I. C. Heron)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인공적인 것 보다 자연적인 것을 강요된 것보다. 자발적인 것을 차가운 합리성보다. 경험과 감정을 외적이며 형식적인 것보다. 내적이며 상상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웰치 (Claude Welch)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자유와 역동주의의 이름으로 형식주의와 구조주의에 저항한 것이며 개체성 감정의 직접성 및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독일 낭만주의는 루소와 레씽에 의해 시작되어 헤르더 (Herder)와 쉴러 (Schiller)에 의해 육성되고 노발리스 (Novalis), 슐레겔 (F. Schlegel)형제, 피히테 (Fichte)등에 의해 개화되었다. 낭만주의는 헤겔 쉐링 등과 같은 철학자와 슐라이에르마허 코러리지 (Coleridge), 뉴우맨 (Newman)같은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현대 정신은 18세기 유럽의 지성계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것은 과학적이며, 낙관적인 세계관을 형성했으며, 과학적 경험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가 그 특징이었다. 이 현대적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이는 성서의 역사적 확실성과 그 가치를 비롯한 전통적인 신학의 모든 전제들을 문제시하고, 집중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나 신학은 이런 도전에 의해 무력해지고 고립화되어 그 토대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19세기초의 신학적 과제는 기독교 신앙의 활력을 회복하고, 창조적인 미래를 위한 신학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즉 현대 세계에 존립할 수 있는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디에서 그 토대를 발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슐라이에르마허 (1768-1834)였다. 그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문제 삼고, 그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1799년에 출판된 그의 처녀작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에게 보내는 종교론(On Religion: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은 이론의 여지 없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언서로 간주되었으며 하루밤 사이에 슐라이에르마허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것은 경건주의를 배경으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해 종교가 현대에서 어떻게 존립 가능한가를 해명한 종교 변증서이다.

계몽주의의 종교연구는 그 본질을 종교 현상에서 발견하려함으로써 종교를 도덕으로 환원하거나 철학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종교는 19세기초 독일 낭만파 지성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계몽주의의 종교관의 비판을 출발점으로 종교의 직접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이며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는 견해이다. 따라서 도덕화되고 이성화되었던 계몽주의 시대의 종교관에 반기를 들고 직관과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주장하여 종교의 독자성을 확보한 것이 그의 공헌으로 평가된다,

종교론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그들이 외면하고 멸시했던 종교에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통주의 교회의 지도자요 슐라이에르마허의 반대자였던 함즈 (Claus Harms, 1778-1885)의 회고록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종교론을 읽고 그의 고상한 삶이 태어난 사건으로 간주할 만큼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의 교의학서인 만년의 저서 신앙론 (1821-1822)은 기독교와 신학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을 과거 도식의 단순한 반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현대 세계와의 살아있는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교의 신학은 주어진 시대의 기독교 교회에서 널리 유행하는 교리를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정의는 슐라이에르마허가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 삼았음을 말해준다

자유주의 신학의 조류와 특징

(1). 신학 조류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사적으로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하여 리츨 트뢸치 하르낙 등 독일 신학계를 지배해 온 신학 전통을 말한다. 이 자유주의 신학 전통은 대략 다음 세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슐라이에르마허로 대변되는 감정의 신학이다. 슐라이에르라허는 비록 학파를 형성하지는 않았으나 신학적인 면에서 19세기 전체가 그의 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영향은 지대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그의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고 아직도 건재하다. 그의 신학을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신학자들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그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특히 네안더 (A Neander), 니이체 (Karl Immanuel Nitzsch), 슈바이처 (Alexander Schweitzer), 트베스텐 (August Twesten)등의 신학자들과 조정신학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둘째 헤겔 철학에 기반을 둔 역사 비평적 신학 또는 헤겔학파의 신학이다. 칸트 이후 서양철학은 헤겔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본래 철학자였으나 그의 철학이 곧 신학이라 할 정도로 신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철학에 대한 그의 공헌은 특히 역사 철학에서 발견된다. 역사는 그 자체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변증법적으로 진보적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을 신학에 도입하여 성서와 기독교의 본질 연구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사용한 학자들이 있다.

헤겔 좌파에 속하는 쉬트라우스 (David Friedrich Strauss, 1803-1874), 바우르 (Ferdinand Christian Baur, 1792-1860), 바이세 (Christian Herrmann Weisse, 1801-1866), 비더만 (A. E. Biedermann, 1819-1885)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현대사상과 과학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여 전통적인 기독교를 포기하거나 수정하려 했다. 특히 그리스도론이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이상적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의 관계 문제를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벨하우젠 (Julius Wellhausen, 1844-1918)은 구약성서 연구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사용했다.

셋째 칸트철학에 기반을 둔 리츨학파의 신학과 트뢸치의 종교사학파의 신학이다.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된 경험 신학 전통의 탁월한 해석자요 자유주의 개신교의 왕자로 불리우는 사람이 리츨 (Albrecht Ritschl, 1822-1889)이다. 리츨은 칸트의 추종자로 그의 비판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현상계와 본체계의 구분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한계성 도덕과 종교의 일치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 역시 리츨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리츨이 형이상학적 신학을 거부하고 경험에 호소한 것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가 신학을 기독교인의 의식이 아닌 역사적 계시에 기초한 것은 중요한 차이점이다. 리츨은 복음이 로마 가톨릭 신비주의 경건주의 낭만주의 등으로 인해 변형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종교 개혁적인 이해로 재해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의 목적은 종교 개혁자의 길을 통해 신약 성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리츨과 더불어 기독교의 윤리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리츨의 사상은 리츨 학파를 형성하여 헤르만 (Wilhelm Herrmann, 1846-1922), 하르낙 (Adolf von Harnack, 1852-1930), 고트쉬크 (Gottschick), 카텐부쉬 (Kattenbush), 숄츠 (Hermann Scholz)에 의해 계승되었다.

한편 19세기 마지막 10년동안 독일에서 발전한 학파가 종교사학파이다. 이 학파는 세계 모든 종교를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과정을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비추어 연구하려 했다. 복음서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요소를 고대근동의 신비 종교로부터 들어온 것이라 하여 제거해 버렸다. 이 학파는 궁켈 (Hermann Gunkel, 1862-1932)이 1888년 출판한 성령의 역사로 부터 시작하여 부세트 (Wilhelm Bousset ), 브레데 (Wilhelm Wrede, 1859-1906), 바이스 (Johannes Weiss, 1863-1918)등이 여기에 속하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트뢸치 (Ernst Troeltsch, 1865-1923)이다.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파생되어 미국 특유의 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했다.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파로는 유니태리아니즘 (Unitarianism)과 사회 복음주의 신학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자유주의 신학의 극단적인 형태로서 합리주의적인 해석에 의해 삼위일체론을 거부하고 유일한 신격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채닝 (William Ellery Channing, 1780-1842)이 그 상징적인 인물이며 스튜아르트 (Moses Stuart), 깁스 (Josiah W. Gibbs)등이 이 파에 속한다.

후자는 당시의 낙관적 도덕주의에 기초한 것으로 복음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여 사회 윤리와 사회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은 그래든 (Washinngton Gladden)에 의해 시작되어 라우쉔부쉬 (Walter Rauschenbush, 1861-1918)에 의해 미국의 전형적인 종교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밖에 저명한 자유주의 신학자로는 버스넬 (Horace Bushnell, 1802-1876)이 있다.

한편 호오던 (William Hordern)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미국의 자유주의는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극단적 자유주의자인 인문즈의 그룹 윌맨 (A. N. Wilmann), 브라이트맨 (E. S. Brightmann)으로 대표되는 경험적 종교철학 그룹 워터맨 (Leory Watermann)의 예수 운동 및 복음적 자유주의자인 대다수의 자유주의 교인이 그것이다. 복음적 자유주의자로 간주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포스딕 (Jarry Emerson Fosdick), 브라운 (W. A. Brown), 코핀 (H. S. Coffin)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났다. 유럽의 신정통주의 신학과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이 그것이다. 유럽에서는 제 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그리고 미국에서는 1929년 경제 대 공항 이후로 자유주의 신학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인간 이성의 능력 낙관주의 역사적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파괴됨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그 사상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능력에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것이 위기에 시대에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는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 따라서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하나님 중심주의로의 전환이 신정통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붕괴된 이후에도 그 영향력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인간의 경험을 중시하는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 신학 민중신학 등 급진 신학이 오늘날도 자유주의 신학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신학적 특징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관심은 크게 세가지로 정리 될 수 있다.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그리고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가 그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 헤겔, 코러리지 채닝 등 19세기 초의 학자들은 종교의 본질과 신학의 과제를 신학적 토의의 주제로 삼았다. 이들이 제시한 새로운 토대에 기초하여 쉬트라우스 바우어 등 19세기 중엽의 학자들은 그리스도론에 관심을 집중했다. 어떻게 역사적 인물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19세기 말 경에는 기독교와 문화 또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가 신학의 새로운 주제가 되었다. 트뢸치의 종교사학파와 사회 복음의 신학이 이를 입증해 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러 갈래로 전개된 자유주의 신학은 어떤 특징과 특색을 지니고 있는가?

첫째,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었다. 성서나 신조를 신학의 출발점이나 궁극적 규범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인간의 종교적인 의식을 리츨이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경험을 신학의 근본적 자료로 간주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 중심적이며 주관주의적인 경향을 띄게 되었다.

둘째,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공관복음서의 자료에 근거하여 역사의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와 구분하려 했다. 특히 역사 비평적 신학파는 신앙의 그리스도는 후대 교회가 부가한 비역사적 요소에 근거한 것으로 취급하고 역사적 예수를 회복시키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에 관한 전통적인 교리를 포기하거나 거부했다. 그리스도를 인간의 원형이나 모본 또는 교사로 봄으로써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완전한 신의식을 소유한 분으로 그리고 리츨은 탁월한 도덕적 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이해했다.

셋째,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무한하고, 완전한 하나님과 유한하고 불완전한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를 주장했으나, 자유주의 신학은 세계 내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신앙과 이성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 하여 종교적 관용의 태도를 취했다

.넷째, 낙관주의적 인간관을 주장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강조한 반면 타락과 원죄 교리를 거부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다섯째, 기독교의 윤리적 사회적 의미를 강조했다. 현재의 세계와 인간의 상황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도덕과 종교의 일치를 주장한 칸트의 영향이며 특히 리츨 학파 종교 사학파 사회 복음주의 신학파에서 현저했다.

여섯째, 현대 과학과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훈을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여 과학의 업적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접근 수단으로 과학적 탐구 방법을 수용했다. 성서 비평은 기독교를 이러한 학문 방법에 적응시켜 보려는 시도였다

맺는말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나 경험에 근거하여 수행함으로써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성과 과학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여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거부하거나 왜곡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성경의 무오성 부정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는 그릇된 출발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능력이나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잘못된 시작은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의 핵심을 상실하고 기독교를 계시종교로 부터 윤리종교로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종교로부터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틸리히가 “유럽에서 개신교는 죽었다. 개신교 신학의 마지막 200년은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외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리츨에서 보듯이 자유주의 신학은 정통주의 신학을 비판점으로 삼아 종교개혁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오히려 종교개혁 전통으로부터 단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건전한 신학은 신학의 네 가지 근원인 성서 전통 이성 및 경험이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다룸에 있어 그것이 성서에서 어떻게 고려되고 있으며 전통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이성에 의해 어떻게 체계화되고 있으며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인간 경험에 관련되어 있는지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계시와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전제로 현대의 정황에 맞는 신학을 모색하고 있는 오늘의 급진신학은 성서와 전통을 희생시킬 만큼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중시했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와 몰락을 귀감 삼아야 될 것이다.

4. 보수주의 신학(Conservative Theology)
보수신학 혹은 보수주의 신학이란 말은 그 의미의 포괄성 때문에 간단하게 정의
를 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적인 정의를 내린다면, 보수신학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과 교리를 옹호하며 지키는 신학이라 하겠다.

보수주의는 신학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교육.윤리면에 있어서도 자유주의나 진보주의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전통.역사.관습.사회조직 따위를 굳게 지키고자하는 사상의 경향일 뿐이며 정확하게 규정된 어떤 사상 내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보수신학의 공통점들은 한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로서는 근대의 성서신학이 많이 진보해 감에 따라 기존에 알고있던 신앙의 중심되는 구절들의 권위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었으며 여기에 대한 자구책으로 이러한 보수신앙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들은 최소한 신앙에 대한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편협성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열려진 마음의 태도가 아니라 기존의 생각을 고수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연유된다 할수있다. 수용과 포괄보다는 비판이 앞서는 모습을 볼수있다. 성서가 기록될당시의 인간의 사고와 오늘날 인간들의 사고가 많이 변천해 왔다는 것에 대한 폭 넓은 이해보다는, 성서에 대한 막연한 절대 권위부여와 지나친 자구적인 이해가 신앙인을 편협하게 만들고 지나치면 바리세주의로 변질될수도 있다는 우려가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기초는 신학이 신앙과 신앙생활을 위한 신학이 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에게나 사고와 나눔의 자유는 있으며, 신앙인으로서 그의 삶을 책임질 의무 또한 있는 것이다. 보수주의 신학에서 그들의 사고와 주장은 당연한 것이나, 좀 더 포괄적인 여유와 포용력을 가지고 나아가면 그들도 또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