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자료

칼빈의 생애

대 덕 2023. 8. 3. 08:30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의 생애를 통하여 자신의 온전하시고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면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지 않으신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54세의 일기로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던 칼빈의 생애를 보면서 더욱 이와 같은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의 태어난 시기, 그의 가정 그리고 그의 교육적 과정과 모든 성장 과정들은 한 때를 사용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1) 칼빈의 배경
칼빈은 독일에서 종교개혁(AD1517)이 일어나기 8년 전 1509년 북부 프랑스 피칼리주 노아이온시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정은 부와 지위를 소유한 가정이었으므로 칼빈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그의 아버지 제랄 코반(Gerald Cauvin)은 그 도시의 유력한 인사였으며 또한 교회의 직원으로서 서기와 회계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쟌느르 푸랑(Jeane le France) 역시 경건한 여성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는 지식과 조직력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경건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칼빈은 이와 같은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많은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서는 귀족들의 자제들과 함께 데카펫 칼리지(Des Capettes College)에서 교육을 받았고, 14살 때 파리에 유학하여 당대의 프랑스 인문주의 신문화의 대 본산인 라 마르슈(La Marche)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그는 몬테그(Montaigue) 대학에서 철학을 4년간 전공하고 문학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이 대학은 에라스므스의 모교로서 보수주의 진영의 중심지였다. 칼빈은 이 학교에서 변증학과 문예부분에서 특별한 도움을 얻었다. 그는 다시 오를레안(Orlean) 대학으로 옮겼는데 이 대학 역시 당대의 저명한 인문주의 학자들이 고전을 잡았던 곳으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등의 고전을 강해하는 당대의 최고 학부였다. 칼빈은 이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특별히 그는 이와 같이 여러 대학에서 학문을 연마할 특권을 누렸을 뿐 아니라 대학을 옮길 때마다 당대의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교수들을 만났고 이와 같은 교수들과의 만남은 그의 생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생애에 영향을 끼친 몇 명의 교수들이 있다. 칼빈은 라 마르슈 대학에서 코디어 교수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사람은 인문주의자이며 교육개혁자였다. 몬테그 대학에서의 노엘 베디어 그리고 1529년 불쥬 대학에서 안드레이 알키아티(당대 법조계의 일인자) 그리고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프랑소아1세의 루이 나바르 공작부인의 고전학을 가르쳤던 멜기올 볼마르(Melchior Wolmar)로부터 헬라어를 수학했다. 이와 같은 그의 교육적 배경은 자신에게 부과된 개혁이라는 과제를 이행함에 있어서 교육에 큰 비중을 두게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을 통하여 이루어진 개혁은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진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칼빈의 생애 전체에 비취어진 칼빈의 모습은 틀림없는 교육자의 모습이다. 칼빈의 학구적 자세에 대하여 그를 가까이 하였던 친우들의 말에 의하면 그가 “얼마나 학문에 대하여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칼빈은 극히 간소한 저녁식사를 하고 밤늦게까지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잠시 명상한 다음 전 날 밤에 읽은 책을 소화하기 위하여 묵상하였다고 한다. 그는 조용한 시간을 극히 사랑하였고 그것에 방해받지는 않을까?에 대하여 언제나 걱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와 같이 계속적인 철야 연구로 말미암아 뛰어난 기억력으로 충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반면에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후일에 요절의 원인이 된 위장병을 지병으로 얻게되었다. 칼빈의 인문주의자로서의 결실은 1532년에 출판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Commentariun de clementia senecae)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하여 명성을 얻으려 했으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칼빈은 이와 같이 인문주의자로서 출발하였다.

2) 칼빈의 회심과 사역
칼빈의 회심에 대해서는 다른 인물에 비하여 극적인 전환점이 없었고 오히려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 가운데 점진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의 회심의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인문주의자로서 칼빈이 복음의 진리로 돌아오게 된 몇 가지 가능성을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칼빈은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 가운데 루터의 글을 접했을 것이다. 종교개혁이 전 유럽의 관심이 되어 가던 때, 신학문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대학에서 수학하던 그가 루터의 글을 접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음은 부친의 죽음을 들 수 있다. 부친의 돌연한 죽음(1531년)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소망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다. 부친의 죽음 이후 칼빈은 가산을 정리하고 파리로 가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고전학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은 결과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가 나오게 되었고 또한 이런 계기를 통하여 성경의 원전을 연구하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가능성은 그가 헬라어를 사사 받은 고전학교수 볼마르가 루터교 신자였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여러 복합적인 원인들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의 진리들을 이해해 갔을 것이다.

그의 회심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1533년 불쥬대학 시대의 벗 니콜라스 코프가 파리대학 학장으로 취임할 때 그의 취임 강연이 문제시 될 때이다. 코프의 취임 연설의 주제는 “믿음으로만 오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과 믿음의 승리”와 “복음에 헌신한 성도를 박해하는 것은 이단”이라는 것이었다. 이 당시 카톨릭 세력이 득세하던 파리대학에서 이 강연은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코프는 추방되었고 여기에 연류 되었다고 의심 받던 칼빈은 신상에 위협을 느끼고 은신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강연의 초고는 칼빈에 의하여 작성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코프는 그 강연의 내용에 대하여 칼빈과 사전 협의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결과적으로 코프의 연설이후 칼빈은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가 가는 곳마다 그를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대 박해가 있었다. 그러나 카톨릭의 교묘한 술책으로 인하여 박해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이 외부세계에 그릇 되게 알려졌다. 즉 카톨릭은 그들의 처형에 대하여 소책자를 발간함으로 그들을 광신자들로 오도한 것이다.

칼빈은 이 순교자들의 삶이 헛되이 왜곡되어 외부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게 된다. 그 자신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순교자들에 대하여 동정을 가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어 그 살인 행위를 계속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힘을 다하여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나는 비겁하고 불충한 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나를 시켜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게 한 원인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왕 프랑소와1세에게 헌정사와 함께 헌정 되어 왕에게 신교도들에 대한 정치적 관용을 호소하였다.

칼빈이 종교개혁에 참여하여 선두에 서 있는 지휘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 그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자로서 어떤 일에 나서는 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개혁자로서의 생애는 더욱 하나님의 섭리하심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출판 후에 더 숨어서 학문에 전념하려고 스트라스브르크에 가던 도중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하여 제네바를 거치게 되었다. 거기서 개혁자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의 강권으로 제네바에 체류하게 되었고 개혁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는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은퇴하여 살기 위하여 택한 스트라스브르크로 가는 지름길이 전쟁으로 차단되었으므로 나는 제네바에 단 하루 밤 머물 예정으로 거기를 통과하였다. 이 직전에 귀인들과 피에르 비레의 진격으로 교황의 도(道)가 이곳에서 축출 당하였으나 아직 사건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시는 부덕하고 위험한 편당으로 나누어 있었다. 지금은 배교하고 도로 교황의 도(道)로 돌아간 한 인사가 나를 발견하고 그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기에 특별한 열성으로 불붙었던 파렐은 나를 만류하려고 신경을 날카롭게 하였다. 내가 다른 모든 욕구를 버리고 다만 조용히 학문 연구에 몰두하기로 결심한 것을 안 때 그리고 내게 간청하는 것만으로 승산이 없음을 안 때 그는 만일 내가 이 긴급한 때에 돕지 않고 은퇴한다면 하나님이 저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저주로 나는 공포의 매를 맞고 내가 계획하였던 여행을 중지하였다…나는 그것을 마치 하나님이 하늘에서 그의 권능 있는 손으로 나를 체포하는 것같이 느꼈다”

칼빈이 제네바에 머물 때에 제네바는 종교개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 제네바는 로마교회의 감독과 사보이공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정치적 자유를 얻으려는 열풍이 이곳까지 미쳐 시민들은 이들에 반대하여 정치적 자유를 얻으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종교개혁에 기울어질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 시에서 “성경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2년 후 선교사로 임명되어 매주 마다 설교하게 되었다. 그가 제네바에서 처음 시도한 일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는 이 일을 인하여 교리문답서 형식으로 교과서를 만들었다. 다음으로 성경의 말씀에 따라 살도록 생활을 훈련시켰다. 마지막으로 교회 질서와 시민 생활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법에 의하여 무도회나 기타 경건생활에 저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금했다. 이 일로 인하여 제네바 시는 도덕적으로 크게 향상되었으나 자신들의 자유로운 생활이 억제 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들의 여론 조성으로 칼빈은 파렐과 구로와 함께 제네바 시로부터 추방되어 바젤로 가서 거기서 잠시 체류하였다. 이 때 그는 귀중한 장서를 저당 잡히고 근근히 생활하였다. 그는 후에 스트라스브르크에 갔는데 거기서 그는 부처, 카피토, 헤리소 등 저명 인사들의 특별한 영접을 받고 그곳에 프랑스 교회를 세우고 신학강의를 베풀었다. 그는 이곳에서 제네바에서 실현시키고자 했던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훈련을 시도했다. 잠시 이곳에 머무는 동안 몇 권의 책을 저술했고 또 결혼했다.

칼빈이 제네바 시로부터 추방당한 뒤 3년 후에 제네바 시는 다시 칼빈을 초청한다. 물론 칼빈이 추방되어 있는 동안 제네바 시는 다시 로마교회로 복귀했는데 이 때 중심인물로는 사돌렛 추기경이었다. 이 사람은 제네바 시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의 부도덕에 분개하였고 또한 신교도의 망명객들을 후대해 보내기도 했다. 이 사람은 제네바 시민들에게 묻기를 1300년의 긴 역사를 가진 옛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25년의 역사밖에 못 가진 신교도의 무리가 공공연히 분쟁을 일으키고 성경을 왜곡하여 자신의 교리를 변명한다 할지라도 그들 가운데서 어느 것이 진리와 확실한 구원을 소유했겠는가? 라고 하면서 이 사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로마교도와 신교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각각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는 장면을 그렸다. 『로마교도는 대답하기를 자기는 “조상부터 전해 받은 신앙에 머물러 있는데 신교도가 입과 손에 성경을 내세우고 신기한 운동을 시작하여 교회에 반항하고 있어도 자기는 거기에 따라 가지 않으며 비록 승려 주교들의 행동이 분을 지어 낼 만큼 성스럽지 못해도 그들의 가르침은 신성하다고 여겨 복종합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의 심판자가 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죄를 주시기를 빕니다”고 한다. 신교도는 뒤이어 대답하였다. “하나님 나는 승려들이 여기저기서 부패했음을 볼 때 분개할 수밖에 없어 그들의 적이 되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고생하며 신학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가운데서 요직에 오르지 못하고 비루한 자들만이 지배적 자리에 오름으로 이와 같은 사람을 공격하였습니다. 나는 교회의 법규를 부수지 못하고는 그들의 힘을 분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인민의 대부분을 유인하여 교회를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모두 이 교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논쟁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유한 사람들을 어찌 속박의 사슬에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에만 의지하고 선행에 의지하지 말기를 가르쳤습니다. 나는 옛사람보다 더 교묘하게 성경을 참고하고 또 논쟁할 때에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전복시키기 위하여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칼빈이 부재한 제네바 시에서 사돌렛 추기경의 공개장의 방향은 컸다. 특별히 상대적으로 무력한 신교목사들로 말미암아 제네바 교회는 동요를 받았다. 여기에 대하여 칼빈은 답신을 썼는데 거기서 칼빈은 개혁자들이 개혁에 대한 주장 때문에 부와 명예의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얻은 일이 없다는 것과 또한 교회 개혁이 세력이나 소유를 얻어내려는 방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로마교회의 미신행위 곧 화체설, 고해, 성자의 중보, 연옥설 등이 그리스도교를 위조한 것임을 말하며 참된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둔다는 것을 말했다. 이와 같은 때 제네바시 의회가 칼빈을 다시 초청했다. 그때 칼빈의 심정은 자신을 추방한 치욕의 도시 제네바에 다시 가기를 원치 않았지만 파렛의 강권함과 또한 칼빈 자신도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여겨 3년만에 다시 제네바로 돌아갔다.

그가 두 번째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제일 처음 시도한 것은 교직의 개혁이었다. 그는 교회의 직원으로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기존 제도를 받아들이되 그 자격을 크게 강화하였다. 즉 그들의 신학적 교육과 훈련을 중시하고 상당한 교육을 거친 자를 교직에 앉혔고 또한 그들의 생활이 경건하여야만 하였다. 또한 그는 제네바 시를 “신성공동체”로 이루려했다. 그래서 모든 정치 영역에서조차 성경의 원리에 따랐다. 그는 설교를 중시하여 제네바시민 1만 3천명을 위하여 일주일에 17번의 설교를 하였다. 특별히 칼빈은 제네바시의 도덕적 질서를 위하여 시민들을 법으로 다스렸는데 그 법의 적용은 상하귀천의 구별이 없었다. 그래서 그 법의 위반으로 처벌받은 사람들 중에는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러한 칼빈의 시민들에 대한 도덕적 강요는 일부 시민들의 반항을 불러 일으켰다. 이로 인한 첫 희생자는 쟉그 그루였는데 이 사람은 칼빈을 제네바 시로부터 추방하려는 계획이 폭로되어 1547년 사형에 집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에 대한 대적들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너무 지나침이 있어 그의 삶에 오점을 남기도 하였다.

특별히 희랍의 학자이며 과학자였던 셀베드(Michael Servetus 1509-1553)를 화형 시킨 것은 종교적 무관용 성을 드러낸 것으로 지적된다. 그 때부터 350년이 지난 같은 날에 제네바의 칼빈의 정신적 자손들은 셀베드에게 행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무관용한 처사를 속량하는 뜻으로 “1903년 10월 27일 샴펠 형장 터에 거대한 자연석 비를 세웠다. 그 정면에는 1511년 9월 29일 아라곤의 뵐르누부에서 출생한 셀베드는 1553년 10월 27일 샴펠에서 분형(焚刑)되었다.” 또 그 뒷면에 “우리들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이면서 시대의 과실인 한 큰 과실을 범한 칼빈의 자손인 우리들은 1903년 10월 27일에 속죄하는 기념비를 세운다”고 새겨져 있다. 그의 생애 가운데 이와 같은 오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네바에서의 개혁의 노력은 한 시대의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특별히 그의 사상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께만 영광”은 정치나 교회 또는 시민생활 등 모든 면에서 적용되었다. 그가 교회를 개혁하였던 것도 또는 세속정치에 개혁하여 “조직과 결단”을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것도 역시 이 일을 위해서였다. 스코틀랜드 개혁자 죤 낙스는 당시의 제네바 도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도시대 이래 지상에 있는 것 중에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였고 제네바 거리에 눈에 뜨이는 악행자가 없게 된 것은 부엉이가 밝은 낮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인물됨은 마지막 임종을 앞에 두고 써 놓은 유언장에서 읽을 수 있다. 1564년 4월 25일 과로와 중첩된 질병으로 병상에 누워 끝내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을 알고 피터 쉐라나토 공증인 앞에 유언서를 진술하였다. 『주의 이름으로 아멘, 제네바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인 나 요한 칼빈은 여러 가지 병환에 고뇌와 압박을 받아 이것으로 주 하나님께서 머지않아 세상에서 불러 가실 것을 쉽게 믿게 한다. 그래서 유언장을 작성하여 나의 최후의 뜻을 다음과 같이 문서화하려고 결심하였다. 첫째로 하나님이 창조하여 이 세상에 두신 나를 불쌍히 여겨 나를 복음의 빛 가운데 인도하였고 내가 전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던 그 때에 구원의 교리에 참여하기 위하여 침윤하여 있는 우상 숭배의 깊은 암흑에서 나를 구출하였을 뿐 아니라 또 같은 긍휼과 인자로 당연히 하나님에게 거부되어 멸망 받아야 할 나의 과오와 죄과를 자비하심으로 참으시고 큰 관용과 은혜를 주셔서 복음 선교에까지 나의 조력을 받으시려고 뜻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이 그의 복음에 의하여 내게 주신 신앙과 종교에 쓰려고 한 것 또한 내게는 이유 없이 아들로 삼아 주시는 것 외에는 구속을 위하여 아무런 방비나 피할 곳이 없고 나의 구속은 전혀 그에게 걸려 있음을 입증하며 언명한다. 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게 베푸신 긍휼에 전 영을 의지한다. 실로 하나님은 나의 모든 범죄와 과오를 위하여 보상하며 그것을 기억에서 흐려 버리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고난과 그 공로로 나의 죄를 속하신 것이다. 다시 나는 나의 지극히 높으신 구속의 주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뜻대로 나를 씻고 깨끗이 하여 주시기를 또 이와 같이 하여 내가 그리스도의 그림자 안에 덮여 심판자리에 설 것을 하나님께 애원하는 것을 입증하여 언명한다. 이와 같이 또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와 사랑의 분량대로 나의 설교에서나 나의 논문 강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결백하게 선포하며 충실히 성경을 해명하려고 노력했음을 언명한다. 나는 또한 내가 복음의 적과 싸운 그 모든 논쟁, 논전에서 어떠한 사술이나 사악한 궤변적 모략을 쓰지 않았고 오직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공평하게 행동하였음을 언명한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나의 열정과 열심 - 만일 이와 같이 일컬을 수 있다면 - 은 너무 큰 부주의와 태만에 싸여 있으므로 나는 나의 직무를 적당히 수행함에 실로 여러 번 실패하였다. 그리고 실로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인자로 나를 돕지 않았다면 나의 열심히 수포로 돌아가 무익했을 것을 고백한다. 아니 나는 더 자백한다. 만일 이 인자가 나를 돕지 않았다고 하면 내게 주신 심적 은사요 주의 심판대 앞에서 죄와 태만의 연고로 나를 더욱 유죄하게 하였을 것을 자백한다. 위의 이유에 따라서 나는 나의 구속을 위한 이 한일 곧 하나님이 긍휼의 아버지이심으로 내가 비참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내게 사랑의 아버지로 나타나신 것 곧 오직 이 한 일밖에 어떠한 근거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며 언명한다. 유해에 대하여는 내가 이 생애를 마친 후 나의 육체가 즐거운 부활의 날이 도래하기까지 이 교회와 시에서 수행하는 형식적 방식에 의하여 매장되기를 바란다.….』

칼빈은 자신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않기를 유언했다. 그래서 그 후 칼빈의 묘는 영영 잊어졌다고 한다. 그 다음날 의원들 앞에서 이같이 말했다. 『의원 제현, 전혀 그러한 영예에 합당하지 않은 자에게 이와 같이 많은 영예를 주신 것, 또 나의 많은 약점을 그같이 자주 인내 깊게 참아 주신 것에 대하여 여러분께 깊이 감사한다. 나는 이것을 언제나 제현들이 내게 대한 비할 데 없는 호의의 좋은 증거하고 보아왔다. 그리고 나는 의무 수행에 있어서 싸워야 할 많은 싸움, 참아야 할 많은 비방이 있었다. 물론 이것에는 누구든지 가장 탁월한 사람이라도 복종해야 할 것인데 이와 같은 사건 중에 하나라도 제현들의 과오에서 일어난 것이 없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인정한다. 그리고 만일 내가 어떠한 일에나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뜻이 없어 그러한 것이라기보다 나의 능력이 없는 탓이라고 해 주기를 간청하는 바이다.…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어떻게 많은 큰 위험에서 제현들을 구출해 주셨는가를 아는 증인이다. 또 여러분은 현재의 상태가 어떠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순경과 역경 어느 곳에 있든지 오직 하나님만이 왕을 세우시고 국가를 건설하시며 그러므로 사람의 예배를 요구하시는 것을 항상 밝히 알기를 바란다.…』 4월 28일 제네바 교직자 전부가 그의 요구에 의하여 그 앞에 갔을 때 『형제들이여 나의 사후에도 이 사업을 굳게 지속하라. 의기 상조하여서는 안 된다. 주는 이 공화국과 교회를 적의 위협에서 구하실 것이다. 경들 사이에는 불화를 없이하고 서로 사랑으로 포용하라. 주께서 너희를 배치한 이 교회에서 너희가 가지고 있는 책임이 무엇인가를 거듭 생각하라. 무엇이든지 너희로 이 교회를 버리고 물러가 버리지 못하게 하라. 실로 기진하고 피곤한 자에게는 도망하는 것이 쉬우리라.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1564년 5월27일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기도하다가 고요히 모든 고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앞으로 갔다.

3. 칼빈의 생애를 정리하며
칼빈의 생애를 정리해 보면 칼빈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고 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가 평생을 추구하며 살았던 목적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께서 인간이 마땅히 따르도록 주신 영적 원리에 따르도록 세상을 개혁해 나가는 것이었으며 그가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확신하고 있었던 방법은 성경을 교육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도록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일생은 이 확신에 이끌린 삶이었다. 그는 이 확신을 개인의 삶 속에 그리고 교회와 국가 속에 또는 시민들의 모든 생활 속에 적용시키기를 힘썼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으로 얻게 된 열매들 가운데 하나는 제네바 시를 신정공동체로 이룬 것이다. 우리는 칼빈의 생애를 통하여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바른 신앙과 그 확신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며, 오늘의 시대가 진리로부터 떠나 방황하고 있는 것은 바른 가르침과 훈련의 부재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칼빈과 같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를 교육하고 삶을 훈련시킨다면 우리 역시 칼빈의 시대에 있었던 것처럼 “위대한 시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칼빈의 생애는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기 위하여 오랜 시간 섭리 가운데 준비 시키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믿음의 조상들과 모세, 다윗, 사도들도 예외적이지 않았다. 특별히 우리는 세상의 구주로 오신 주님께서 3년 동안의 공적 사역을 위하여 나사렛에서 사신 30년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지라도 준비되지 않으면 그 일에 합당하게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를 사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그 일을 행하기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믿음을 준비하지 못함으로 영광스런 부르심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부르심은 안타깝게도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들과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사람을 실족하게 했다.

특별히 우리가 일군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훈련의 영역이 있다. 이것들 가운데 하나는 학문적 훈련이다. 영적 생활은 진리를 앎으로부터 시작되고 배움은 영적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움이 중단되면 성장도 중단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하여 요구되는 과정들을 원하지 않는다. 배움은 과정과 값이 요구되는 일이므로 겸손과 인내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값을 지불할 줄 아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열매다. 다음은 경건의 훈련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인격적 훈련, 또는 자기관리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훈련이 요청되는 것은 참된 지식은 결코 생활과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옳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수밖에 없다. 어떻게 칼빈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많은 반대와 역경 속에서 개혁자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만유의 주로서 알았으며 그 앞에서 인간이 행하여야할 본분은 그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은 지식은 칼빈으로 하여금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인가를 알게 해 주었고 또한 그렇게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진리의 지식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줄 때 비로소 우리는 부르심에 따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지식일지라도 삶의 원리로서 생활 가운데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지식에 따라 사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에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먼저 진리를 알기 위하여 학문적 노력이 필요하고 동시에 이 지식을 생활화로 이끌어 주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일군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알아야 할 것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은 역사를 새롭게 창조할 수는 있지만 인위적으로 역사의 부름 앞에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이 말은 역사가 어떤 사람을 선택하여 그를 봉사자로 세우기까지는 아무도 스스로 역사 앞에 나설 수 없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해 본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도 스스로 일군으로 자처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사용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까지 잠잠히 참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칼빈이 박해를 피하여 스트라부르크로 가던 중 전쟁으로 인하여 지름길이 막혀 제네바를 통과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개혁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 자신도 이 사건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정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개혁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부르심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