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핵심자료

성경에 관한 상징들

대 덕 2024. 4. 7. 12:18

1. 마실 책
오리게네스는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주석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성서는 trampoline(트램펄린)이라는 상징의 역할을 한다. 성서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야곱의 우물을 이용하셔서 사마리아의 여인을 생명수의 참된 샘인 당신께로 오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가는 ‘트램펄린’ 역할을 한다. “성서는 하나의 안내문입니다. 이 안내문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길을 잃지 않고 반드시 예수께로 옵니다. 그러면 그분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샘을 줄 것입니다.”

또 시리아의 에프렘은 “주님은 당신 말씀 안에 갖가지 보화를 숨겨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묵상하는 것에서 풍요로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이 풍요함의 일부를 발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창고에는 자신이 발견한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단계적으로 밖에 얻을 수 없는 것을, 염치없이 한 번에 모두 다 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한 번에 조금밖에 받을 수 없는 것에서 물러나지 마십시오.”

2. 먹을 책
성서는 “마음의 양식”이다. 성서는 자신에게서 영양분을 취하는 사람에게 적응할 뿐 아니라, 그를 변화시켜 자신의 필요에 따라 변형시킬 능력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성서는, 성체성사의 빵처럼, 자신을 먹는 사람을 동화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 특히 에제키엘에게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어라. 그리고 그것으로 배를 채워라(에제 3,3) 또 영성의 대가들은 되새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즉 듣고 읽은 성서를 철저히 흡수하여, 마음과 정신 안으로 계속 돌려놓을 필요성을 강조한다.

3. 달리는 책
성서는 돌아가는 바퀴와 같다. 이 상징적 해석은 ‘대 그레고리오’와 연관되어 있다. 그레고리오에게 수레바퀴는 성서의 상징이다. “성서는 바퀴처럼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맞추기 위해 모든 방향으로 돈다. 성서는 어떤 길모퉁이에서도 그 속도가 떨어지지 않는 바퀴와 같아서, 선포될 때 어떤 오류에 의해서도 그 힘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힘” (로마1,16)이다.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리는 육상 선수처럼 자유롭고 끈질기게 그 길을 달려야 한다.”(2데살3,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혹시 감옥에 갇히고 박해를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2티모2,9). 성령은 경주의 원동력이다. 사실 오순절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에 이르는 이 달음질의 시작을 의미한다. 성서는 그 안에 성령이 주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성서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된다.”(1코린9,22). 어느 곳에 이르든지, 성서는 모든 이를 ‘함께 모으며’, 매력으로 잡아끌며 모두 하나가 되도록 한다.

4. 상징하는 책
역동성은 장과 관계가 있다. 루카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났다.”(사도6,7)라고 증언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란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더 넓은 영역으로 지속적으로 퍼져 나감으로써 제자들의 수가 불어나는 데서, 알아볼 수 있는 가시적인 말씀의 상징이다.

그레고리오는 “성서는 읽는 사람들과 함께 성장한다.”성서는 읽혀짐의 결과로 성장한다. 즉 독자와 본문의 동시 성장이다. 이 동시 성장은 독자 개인의 차원에서만 발생하지 않고, 훨씬 더 밀도 깊게 공동체에서도 발생한다. 특히 전례를 거행하는 교회 공동체는 성서의 성장을 위한 특권적 장소이기도 하다.

5.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는 책
성서가 다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성서는 하나의 상징이어서 그 안에 여러 가지 의미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만날 수 있으며, 서로 배제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

6. 불타오르게 하는 책
“살아있고 힘이 있는”(히브4,12)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만나게 한다.’ 그것을 체험한 엠마오의 두 제자는 “그 분이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루카24,32)
예레미야는 “오 주님,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그러나 뼛속에 갇혀있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예레 20, 7-8).

성서는 유혹한다. 열정적인 사람이 되게 하며, 불을 붙인다. 성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온 힘을 다해 성서 안에 감춰져 타오르는 불꽃에 자신이 감춰지도록 해야 한다.

많은 교부는 성서를 상징하는 불에서 매혹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자신을 성서라는 불에 불타오르도록 내맡긴다는 것은 아가가 말하는 (아가 8, 6) 저 ‘불혀’들에 타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임의키스를 받는 것이며(아가 1,1), “산 넘어 언덕 넘어 껑충껑충 뛰어오는” 임을 만나는 것이다.

7. 상처를 주는 책
동감, 즉 하나님의 지평과 인간적 지평이 합쳐지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별과 존재론적 거리까지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만남은 갈등에 면역되어 있지 않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기도 하다(히브 4,12). 하나님의 말씀을 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말씀이 상처를 내고, 베며, 충격을 주고, 뒤집어 놓고, 전복시키며, 안전을 제거하고, 상처를 더 넓혀 놓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체험은 상징적이다. “Tolle et lege"(집어 읽어라)라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초대 말씀은 그를 인도하여 성서 안에서 그 이전까지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켜 해방시키는 칼을 발견하게 하였다. 그는 성서에로의 회심을 ”나는 나 자신을 속이면서 성서에 접근 했다. 추구하는 열망을 가지고 접근하기 보다는 토론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성서에 접근했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태도로 인해 면전에 있는 내 구세주의 문을 닫고 있었다.....겸허한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던 것인데... 한심한 나여, 나는 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둥지를 버렸는데, 그만 날기도 전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집어 들어 다시 둥지로 올려놓으셔서, 내가 행인들에게 짓밟혀 죽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그 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주님께로 돌아선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