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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대 덕 2024. 9. 1. 07:39

은사의 그리스어는 ‘카리스마’로서 은혜(카리스)의 선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회심할 때 이 은혜의 선물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각자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이 은혜의 선물은 오직 회심하여 성령으로 난 자만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이 은혜의 선물을 주시는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엡 4:12). 또한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각자가 받은 은사를 통하여 모든 지체가 공동의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고전 12:7).

은사의 목록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신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에 계시되었습니다. 이 세 장에 계시된 은사의 종류, 은사를 주신 대상, 은사의 특징에 대해서는 아래의 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성령님이 지역교회에게 은사를 주셨지만, 로마서 12장에서는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은사를 주셨으며(3절), 에베소서 4장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우주적인 교회)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8절).

이 은사가 발휘되는 곳은 지역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역교회에서 은사를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각 신자에게 주셨습니다. 신자들 중에는 간혹 자신이 받은 은사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 가운데에는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받는 은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돕는 은사(고전 12:28)와 섬기는 은사(롬 12:7)와 주는 은사(롬 12:8)와 긍휼을 베푸는 은사(롬 12:8)입니다.



성경 은사들 대상 특징
1 고전
12:4-10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기적들 행함, 대언함, 영들 분별함, 타언어들, 타언어 통역 신자들 성령님이 주심
표적 은사
2 고전
12:28-31
사도들, 대언자(선지자)들, 교사들, 기적들, 병 고치는 은사, 돕는 것들, 다스리는 것들, 타언어(방언)들 지역교회
3 로마서
12:3-8
대언(예언), 사역, 가르치는 자, 권면하는 자, 주는 자, 다스리는 자, 긍휼을 베푸는 자 신자들 하나님이 주심
4 에베소서
4:4-11
사도들1), 대언자들1), 복음전도자들2), 목자들2), 교사들2) 우주적인
교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심
1) 기초 은사
2) 영구 은사

이 번 교제에서는 고린도전서 12장을 중심으로 지역교회의 실행과 은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보고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고린도교회 - 은사의 오용과 남용

하나님께서는 고린도교회에게 다양한 은사를 풍성하게 주셨습니다(고전 1:7).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서 벗어나서 은사를 오용하거나 남용함으로써 교회 안에 분쟁과 분열을 야기 시켰습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지역교회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과 뜻을 제시한 후, 13장에서 은사를 조화롭게 사용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요소가 사랑임을 보여주고, 이어서 14장에서 지역교회의 공적인 실행을 위해서 은사를 사용하는 문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2장 4-31절에 계시된 은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은사의 근원 - 한 성령

“이제 은사는 여러 가지나 같은 성령이시고”(4절)

4절은 은사의 저자이자 근원은 성령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은사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는 은사들의 다양성을 증거합니다. 또한 “같은 성령”은 은사의 통일성, 곧 하나됨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지역교회의 하나됨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그것은 은사의 다양성이 분쟁을 조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나뉠 수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분쟁을 조장하는 은사는 그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직무의 근원 - 한 주

“직무는 다르나 같은 주시며”(5절)

여기서 “직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섬기다”는 의미를 갖는 어원에서 파생한 단어의 복수(複數)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모든 섬김을 의미합니다. 직무는 다양할 뿐 아니라 구별됩니다. 이 다양한 섬김은 지역교회의 머리되시는 주 예수님께서 각 신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 신자는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섬겨야 합니다. “같은 주시며”는 4절의 은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섬김에서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됨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뉠 수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섬김은 다양성 가운데 하나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같은 하나님이 계시되”(6절)

“너희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 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에 두루 계시며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엡 4:4-6).

한 하나님께서 지역교회의 각 성도 안에서 다양하게 일하십니다. 지역교회의 모든 지체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우리는 4-6절에서 하나님의 신격에 대한 한 가지 기본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곧 “같은 성령, 같은 주, 같은 하나님”은 다양성 가운데 신격의 하나됨을 나타냅니다.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도 동일한 순서로 하나됨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분쟁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며, 우리는 반드시 다양한 은사와 섬김과 역사 가운데서 이 하나됨을 지켜야 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 - 모두가 유익을 얻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7절)

바울 사도는 4-6절에서 은사를 주시고 일하시는데 있어서 세 인격의 하나됨을 보여준 후에, 7절부터는 은사를 주시는 목적과 은사를 발휘함에 있어서 하나됨을 보여줍니다.

7절은 은사가 “성령의 나타나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타나심”은 단수가 사용되었습니다. 곧 다양한 은사는 모두 한 성령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은사들이 기능을 발휘하는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는 지역교회 안에서는 사람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유익”이라는 단어의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공동의 유익”을 의미합니다. 지역교회 안에서 다양한 은사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나타나시는 유일한 목적은 지역교회 안의 모든 성도가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님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시지만 목적은 하나입니다. 바로 각각의 은사로 말미암아 지역교회의 모든 지체가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모두가 유익을 얻기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어떠한 영적 은사도 사적이거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과, 은사를 가진 자의 과시 또는 자아도취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지역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은사를 소유한 자들로서 각기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표적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병 고치는 선물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대언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언어(방언)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타언어(방언)들 통역함을 주셨으나”(8-10절)

“그들이 나아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매 주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로 말씀을 확증해 주시니라.”(막 16:20)

8-10절에는 9가지 은사가 제시됩니다. 이 9가지 은사의 특징은 초대교회 때에 지역교회 안에서 일시적으로 역사했던 초자연적인 은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이 말하듯이, 이들 은사들은 완전한 것이 올 때까지 표적의 형태로 역사하면서 일시적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정경이 완성되고 더 확실한 말씀(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대체되면서(벧후 1:19-21), 이 은사들은 그쳤습니다. 오늘날도 존재하는 은사들(예; 대언, 지식)은 초대교회 때와 다른 형태로 기능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표적은사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막 16:20)(히 2:3-4). 이들 표적은사는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임을 증명하는 신임장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곧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했습니다.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나누어 주심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11절)

이 구절은 모든 은사의 근원이신 성령님께서 어떻게 신자들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각 신자의 필요와 능력을 아시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각 신자가 있어야 할 위치를 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각 신자에게 개별적으로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앞에서 교제되었듯이 “한 성령께서 행하사”라는 구절은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통일성을 갖고 하나됨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곧 은사는 개인적인 소원이나 요구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처럼 자랑하지 말고, 성령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서 받은 것임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불평하거나 자랑하거나 시기하거나 경쟁을 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지역교회 - 한 몸과 많은 지체

“몸은 하나이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니라.”(12절)

사도는 12절에서 사람의 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지역교회를 비유합니다. 그리고 13-30절에서 사람의 몸을 예증으로 지역교회 안에서 발휘되는 은사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들 구절에서 은사가 발취되는 범위는 지역교회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하나,” “한,” “많은,” “많아도”는 은사의 하나됨과 다양성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성령 침례와 성령의 인침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13절)

이 구절에서 “침례를 받아”와 “마시게 되어”에 사용된 시제는 모두 과거에 단 한 번 발생한 것을 뜻하는 부정과거시제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성령의 침례를 받은 것과 성령을 마시게 된 것은 같은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의 침례는 오순절 날 단 한 번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마시게 된 것은 각 신자가 구원받을 때 발생한 일로서 오순절에 발생한 일의 실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마치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때에 죄 사함과 구원을 받지만, 그를 구속한 것은 이천년 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을 때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비록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역교회를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삽입구적인 방식으로 교회시대에 우주적인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신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님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오심은 유일하고 최종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적인 몸인 교회의 탄생일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매년 생일을 갖지만, 실제로 생일은 오직 하나의 생일이 있을 뿐이며, 매년 갖게 되는 생일은 모두 기념하는 날들인 것과 같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신자가 구원받을 때에 성령으로 침례 받는다고 말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받을 때, 그는 오순절에 일어났던 성령 침례의 실제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가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성령의 침례가 아닌 성령의 내주하심,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인침(봉인), 성령의 보증으로 말합니다.

한 지체가 아닌 여러 지체로 구성됨

“몸은 한 지체가 아니요 여러 지체이니라.”(14절)

몸 전체와 한 지체를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몸은 한 두 지체가 기능을 발휘해서는 안 되며,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성경은 몸이 단지 한 두 지체가 있는 것 같이 보일 때,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기독교계 안에 편만하게 실행되고 있는 성직자 계급제도가 하나님의 교회를 거스르는 것임을 증거합니다. 교회가 계급제도의 구조 아래 있거나, 구약의 레위체제를 따라 소수의 성직자들만 대표로 섬기며, 대다수의 다른 지체들은 없거나 마치 죽은 것처럼 있다면, 그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만일 각 지체가 받은 다양한 은사들이 몸의 사역에서 소외당하고, 한 두 지체의 사역이 마치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실행되며, 한 두 지체의 기능이 교회의 전체 기능으로 발휘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입니다.

열등한 지체는 없음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한다, 하면 이런 이유로 그것이 몸에 속하지 아니하느냐? 만일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한다, 하면 이런 이유로 그것이 몸에 속하지 아니하느냐?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냐?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15-17절)

우리는 15,16절에서 발과 귀가 각각 손과 눈을 시기하며 불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발은 자신을 귀와 비교하기 보다는 손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항상 우리 자신보다 훨씬 높은 사람을 시기하지 않고, 우리보다 조금 위에 있는 자들을 시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의 말씀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곧 그리스도의 몸에 열등한 지체는 없으며, 없어도 되는 지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없어도 되는 지체가 있다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각 지체가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다른 지체를 시기하는 것은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만일 한 지체가 자기 은사에 불만이 있다면, 그의 불만은 자신보다 더 은사 있는 지체들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모든 지체들을 정하신 하나님께 불만을 갖는 것입니다. 스스로 열등하다고 느끼는 지체들은 11절과 18절을 보며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마음을 깊이 상고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몸 안에 두심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곧 그것들 각각을 몸 안에 두셨느니라.”(18절)

18절은 “그러나”로 시작됩니다. 사도는 열등감과 시기감에 사로잡힌 지체들을 몸을 창조하신 분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여기서 “두셨다(set)”의 시제는 부정과거시제입니다. 이 시제는 시간의 한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 안의 모든 부분에서 창조의 권능을 행사하셔서 사람의 몸을 형성하신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각 지체의 자리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한 뜻과 흠이 없는 계획과 지혜에 따라 정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를 완전하고 적절하게 그 위치에 두셨습니다. 각 지체들이 구별된 고유한 기능을 갖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그 위치를 정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놀라운 가르침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뻐하시는 대로 친히 각 지체를 몸 안에 두셨다면 누가 감히 그 지체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 중에 단 한 지체라도 무시를 당할 경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지체를 두셨을 때 가지셨던 기쁘신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 안에 있는 지체의 위치는 지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분이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그분의 뜻 안에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은사에 대해 불평불만을 갖거나 다른 지체의 은사를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자신을 지체로 두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몸은 어디 있느냐?

“만일 그것들이 다 한 지체라면 몸은 어디 있느냐?”(19절)

17과 19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17절은 다른 지체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19절은 몸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각 지체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두셨습니다. 따라서 한 지체만 있는 것같이 움직이는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고자 한 지체, 한 지체를 정하신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지체가 한 가지 기능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몸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몸은 어디 있느냐?”

만일 교회가 계급제도에 의하여, 또는 카리스마적인 지배에 의하여, 또는 한 두 지체의 뛰어난 은사에 의하여 단지 한 두 지체의 기능만 보인다면, 주님은 그러한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찾으실 것입니다. “몸은 어디 있느냐?”

이 구절들은 영적 은사의 남용과 오용으로 고린도에 있던 분쟁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수의 사람이 다양한 기능을 스스로 취하는 성직자계급주의의 교권주의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몇몇 지체가 기능을 독점하거나, 다른 지체의 기능들을 빼앗는 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행이 아닙니다. 몸이 모든 다양한 기능들을 가진 유기체임을 포기할 경우,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몸의 하나됨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많은 지체이나 그럼에도 오직 한 몸이라.”(20절)

14절이 지체들의 다양성을 강조한다면 20절은 통일성과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다양성은 하나됨의 필수요소입니다.

“그럼에도”가 보여주는 하나됨에 관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지역교회 안에 많은 지체들이 있지만, 그것은 단 하나의 몸입니다. 교회는 다양성이 있어야 하지만 하나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두 개의 몸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몸은 성경이 말하는 몸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한 몸”을 말합니다. 이는 몸 안에 어떠한 분쟁이나 분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의 덜 귀한 지체들의 필요성

“눈이 손에게 이르기를,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며 또 머리가 발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리라.”(21절)

15절과 21절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요? 15절에서는 몸의 아래에 위치한 지체(발)가 위에 위치한 지체(손)과 비교하면서 시기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21절에서는 위에 위치한 지체(눈, 머리)가 아래에 위치한 지체(손, 발)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필요 없다 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셨을 때, 각 지체와 지체 간에 상호 의존하도록 세우셨음을 보게 됩니다. 어떠한 지체도 기능에서 다른 지체보다 뛰어난 지체는 없습니다. 각 지체는 서로 필요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지체도 다른 지체들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21-24절은 사람의 눈에 우월하게 보이는 지체와 사람의 눈에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여줍니다. 사람의 눈에 귀한 것으로 여기는 지체와 사람의 눈에 덜 귀한 것으로 여기는 지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여줍니다. 사람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지체와 사람의 눈에 아름답지 않게 보이는 지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여줍니다. 사람의 눈에 열등하고, 약하고, 아름답지 않게 보이는 지체에 대한 우월과 교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요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두 지체가 연주하는 독주곡이나 협주곡보다 각 지체가 한 지휘자와 한 악보 위에 한 마음으로 연주하여 조금의 불협화음도 없이 화음과 멜로디의 조화 가운데 각 악기의 음색을 드러내는 교향곡을 기뻐하십니다.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더욱 필요함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그 지체들이 더욱 더 필요하고”

바울 사도가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몸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약하게 보이는 몸의 기관들(복수)이 “더욱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약하게 보이지 않는 지체의 기능을 위해서와 전체적인 한 몸의 기능을 위해서 오히려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훨씬 더 필요한 것입니다. 약하게 보이는 지체는 하나님 앞에 “한 몸”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오히려 약하게 보이지 않는 지체들보다 훨씬 더 필요한 것입니다. 각 지체를 통하여 “한 몸”의 생명이 나타내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친히 약하게 보이는 부분들이 더욱 더 필요하도록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몸)는 서로의 필요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각 지체는 서로에 대하여 더욱 더 필요한 존재입니다. 몸에는 결코 쓸모없거나 가치 없는 지체가 없습니다. 각 지체는 유기적으로 필요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따라서 한 지체라도 이 필요함에서 벗어나거나 떨어진다면 전체는 필요함을 느끼는 불균형 가운데 있는 지체부자유자가 될 것입니다. 아름답게 보이는 부분들이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을 무시하거나 필요 없다고 여길 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그 지체들이 더욱 더 필요하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들이 아름다운 것을 더 풍성히 얻음

“또한 우리가 덜 귀한 것으로 여기는 몸의 그 지체들 곧 이것들에게 우리가 귀한 것을 더 풍성히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은 아름다운 것을 더 풍성히 얻나니”(24절)

이 구절에서 아름다운 부분은 얼굴과 같이 공적으로 들어나는 사역을 하는 지체를 가리킵니다. 이에 비해 “덜 귀한” 지체나 “아름답지 못한 부분”은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역을 하는 지체들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이 강조하여 가르치는 교훈은 우리의 눈에 덜 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지체들과 우리의 눈에 아름답지 못하게 보이는 지체들을 더 존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공적으로 대중 앞에 드러나는 지체들이 제 기능을 수행하고, 그런 일에 적합하지 않은 지체들은 대중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제 기능을 발휘함으로 온 교회는 경건한 질서와 조화의 아름다움을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의 어떠한 부분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서로 주고받아야 합니다. 서로는 서로에 대해 필요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더함도 덜함도 없어야 합니다. 모두가 필요한 상태로 서로 의존하며 유기적인 관계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몸을 고르게 하사

“우리의 아름다운 부분들은 부족한 것이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몸을 다 같이 고르게 하사 부족한 그 부분에게 더욱 귀한 것을 풍성히 주셨으니”(24절)

“고르게 하다”는 단어의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함께 혼합하다’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고대 문헌에서 화가가 자신의 작품이 요구하는 정확한 명암을 얻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색을 배합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바로 그 고르게 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에 더욱 귀한 것을 풍성히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완전하고 균형 있는 내적인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그 부분에게 더욱 귀한 것을 풍성히 주심으로써, 그 몸을 더불어 조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의 균형을 위하여 기울여지는 저울 위에 풍성한 균형을 더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이 나머지 지체들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몸을 만드셨습니다. 각 지체들이 서로 같은 정도로 상호 의존하게끔 각 지체들을 연결하고 고르게 하셔서 완전하고 균형 있는 내적인 조화를 이루는 유기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혹 자신이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요(22절), 덜 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지체(23절)라고 생각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러한 생각이 들 때마다 이 하나님의 “고르게 하신” 손길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지체들이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음

“이것은 몸 안에 분쟁이 없게 하고 오직 지체들이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25절)

하나님께서 몸을 다 같이 고르게 하셔서 부족한 부분에게 더욱 귀한 것을 풍성히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몸 안에 분쟁이 없게 하고,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몸”을 위하여 어떠한 분쟁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부족한 지체들에게 친히 더욱 귀한 것을 풍성히 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무시하고 "한 몸“을 지키지 못하거나, 각 지체들에 대하여 서로 같이 돌보고자 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각 지체들이 서로를 향하여 같은 배려를 갖는 대신에 서로 비교하거나 시기하는 경우, 지역교회는 "한 몸“의 조화를 잃고 나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한 몸” 안으로 부르신 부르심 안에는 그분의 몸에 분쟁이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은 배려를 갖는 것을 원하시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가지고 있는 배려가 같아야 분쟁이 없고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함께 고통을 받고 함께 기뻐함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그것과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존귀를 얻으면 모든 지체가 그것과 함께 기뻐하느니라.”(26절)

구약 시대에 가장 무서운 병은 나병(문둥병)이었습니다. 나병은 신경기관을 손상시켜서 말단 신체기관들이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지체와 지체 사이에 어떠한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 감각이 단절되기 때문에, 한 지체가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어떤 지체의 고통을 다른 지체들이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나병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만일 몸이 이러한 감각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각 지체들이 몸 안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몸이 이러한 느낌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각 지체들이 “한 몸”의 증거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각 지체가 지체간의 아픔을 느끼지 못할 때 유기적인 몸과는 상관없는 개별적인 신체기관이 되어 버려서 자연히 분쟁 가운데 있게 됩니다. 또한 한 지체가 각 지체간의 고통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면서 자기 기능만을 발휘할 경우, 그 역할이 아무리 뛰어나고 업적을 쌓고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칭찬을 받는 것일지라도, 그의 사역은 “한 몸”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의 고통이 어떤 지체의 고통에서 기인한 것인지 돌아 보셨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기쁨이 어떤 지체가 영광을 얻음으로 인한 것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지역교회 - 그리스도의 몸이 나타남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27절)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구절은 원어에서 몸 앞에 정관사가 없습니다. 이는 우주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그 몸”이 아니라 지역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몸인 지역교회를 가리킵니다.

몸의 주된 개념은 나타남(manifestation)입니다(딤전 3:16). “그리스도의 몸”이란 표현은 지역교회가 그 지역사회에 대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단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의 7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은사는 “성령의 나타나심”입니다. 성령께서는 은사들이 기능을 발휘하는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지역교회의 우선적인 책임입니다. 이것은 각 지체가 자신의 은사와 섬김과 사역을 통해서 단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어떤 지역에서 자기 백성을 통해 사시는 것입니다.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나타나는 방법은 다양성 안의 통일성입니다. 그것은 하나됨 안에 동역하는 여러 지체들로 표현됩니다.

은사들을 사모함

바울 사도는 은사에 대해서 가르침을 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에서 “오직 가장 좋은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사모하다”는 복수 동사입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좋은 은사를 사모할 수 있거나, 개인적으로 좋은 은사를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개인적으로 은사를 얻기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에서 은사를 가진 자들이 세워지기를 사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전적으로 지역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증거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의 기능입니다. 곧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하시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들과 성령의 열매는 다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열매입니다. 은사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몸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은사가 온전히 발휘될 때 그리스도께서 지역교회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다양한 지체들이 하나됨 안에서 함께 역사하는 가운데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루는 생명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은사의 특징으로는 첫째로 한 하나님이 주신 하나됨(통일성)과 각각의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필요한 유기체로서의 다양성과, 둘째로 각 은사가 서로를 의존해서 그 기능을 발휘함으로 몸에 유익을 주고 몸을 세우게 하는 상호의존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의 일체성(하나됨)과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은 사랑에 의해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즉 은사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고 자라기 위해서는 각 지체들을 통하여 은사가 조화 가운데 바르게 발휘되도록 역사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영적 은사가 유익하려면 사랑으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모든 신자는 회심할 때 새 생명과 함께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상태의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구원받은 후 성도의 합당한 섬김을 통해서 개발되며, 조금씩 완전함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시고, 권위와 권능과 사랑으로 역사하셔서 그 은혜의 선물로 몸된 교회를 섬기게 하신 주님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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