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자료

하나님은 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지요?

대 덕 2024. 4. 24. 10:58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삶과 생각을 맞추는 것이다.
원래부터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기도를 찾아가는 과정이 내 삶의 성숙이다.
기도가 없다면 어디서 하나님과 나를 비교할 수 있을까?
기도의 응답은 나의 변화지, 하나님의 변화가 아니다.
하나님은 늘 같은 자리에서 응답하신다.
기도는 내가 그 자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통로이다.

"기도로 뭘 구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 이뤄지고,

기도 안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이뤄질테니 기도가 무슨 소용인가?"
기도의 효용을 놓고 심심찮게 터져 나오곤 하는 볼멘 소리이다.
초대 교부 오리겐도 "하나님이 장차 무슨 일을 있을지 미리 아시며 만사가 그대로만 진행된다면

기도는 쓸데 없는 짓"이라고 유사한 말을 했다.
이런 의문은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나?'
'기도는 정말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나?' 하는 질문을 거쳐 결국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나?'라는 질문으로 귀착된다.

어쩌면 기도는 간구하는 사람의 뜻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만나고 충돌하고 씨름하는 지점이라는 면에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한 영역에 속한다.

'개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그의 고통을 그대로 묵인하는 듯한 하나님은 과연 정당한가?'
이런 의문과 함께 기도의 효용에 대한 회의론과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불가지론에 본의 아니게

제법 무게감 있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기도에 응답받는 삶인가 아닌가로 신자와 비신자의 삶의 정체성을 가리려는 이들에게,

이런 문제는 꼭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변증 전도의 과제이기도 하다.

기도에 대한 네 가지 정의
미국 복음주의의 최고 작가로 불리는 필립 안시Philip Yancey가 기도의 원리와 방법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방대한 관련 자료들을 집대성해 써 낸 책('기도하면 뭐가 달라지나요?'<필립 안시>)을 읽다 보면, 의외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이 금세 손에 잡힌다.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가 기도와 관련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당하심에 의문을 품는 모든 문제의 뿌리다.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나?’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이 책 곳곳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기도에 대한 정의와 그 실천적인 풀이를 네 가지로 요약해 본다.

첫째,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삶 전체를 들고 나와서 정결하게 씻어 내고 제 모습을 되찾으라고 초청하는 안내장이다.
인간은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근본적으로 기도는 자세, 즉 자신을 어디에 놓느냐의 문제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는커녕 제한하려고 발버둥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믿고 따르는 길은 오직 기도뿐이다.
하나님은 휴가를 즐기자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우리가 잠시 하나님 노릇을 쉬면, 그분이 친히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는 방어벽을 바짝 낮추고 다른 누구의 모습도 아닌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시는 하나님에게 최대한 보여 드리는 과정이다.

둘째, 기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불러오는 도구가 아니라, 거룩한 임재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기도하는 쪽에서 실감하든 못하든, 주님은 응당 그 자리에 계신다.
무엇을 요청하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의 주목적은, 생활을 더 편하게 만들거나 기적적인 능력을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주님이 주시는 그 어떤 선물보다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는 더 필요하다.
기도하는 이유가 유익뿐이라면, 인격적인 관계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셋째, 기도는 하나님에게 새로운 정보를 드리는 의식이 아니다.
"주님은 저에게 이것이 필요하다는 걸 모두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는 편이 타당하다.
서로를 깊이 알면 알수록 커뮤니케이션에 필요한 정보의 양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기도할 때 내면의 대화 상대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서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전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는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나는 대화 상대이므로,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끝없이 공부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귀가 열린다.
엄청난 차이를 무릅쓰고 하나님을 따른다면, 입이 열리고 이어서 마음까지 활짝 열릴 것이다.

넷째, 기도는 꾸밈없이 정직하게 하나님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편의 절반 이상이 세상에서 부딪히는 모순에 대해 탄식하고 저항하며 불평하는 시가다.
매사에 낙관적인 복음주의 교회가 행복한 이야기만 나누고 즐거운 노래만 부르는 건 비현실적이다.
시편은 성내고, 짜증부리고, 쩨쩨하게 굴고, 후회하고, 격정적이고,

시끄럽고, 불손한 면모를 모두 담고 있어 지극히 인간적이다.
하나님은 기도에 제의적 탄식이 끼어드는 걸 환영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감정을 마음껏 분출하도록 허락하시고,

더 나아가 장려하시는 걸 보면 기도를 통한 파트너십의 결속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파트너십을 위한 매개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가, 아니면 나를 변화시키고 내 뜻을 바꾸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일찌감치 

‘나를 바꾼다’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의 영향으로 기도의 초점은 ‘주님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간구하는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칼빈은, 하나님이 짐짓 기도에 설득되어 뜻을 바꾸셨다는 듯 사랑을 베푸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변치 않으신다는 말씀만큼이나 마음을 바꾸신다는 말씀도 많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말라기 3:6)라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세아 11:8)라는 말씀도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저자는 이 문제를 놓고 섣불리 단순한 대답을 구하지 않는다.
해답의 실마리를, 기도가 하나님과 인간의 동역 관계, 곧 파트너십을 위한 매개체라는 사실에서 찾는다.

저자에게 기도는 파트너십, 즉 하나님과 인간이 미묘하게 상호 작용하면서 거룩한 뜻을 이뤄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강요나 완승을 전제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인격적 교제를 통한 상호 교감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과 협력하는 가운데 은혜가 작동되면서 자연스럽게 파트너십이 형성된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를 듣고 반응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이 파트너십의 관계를 통해서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루는 일에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게다가 자가당착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조언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생각이다.
주님이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하다면 무엇이 최선인지 모르실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정말 선한 분일라면 기도하든 말든 그 일을 행하시지 않겠는가?
기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왜 손을 씻는가?
C.S 루이스는 말한다.
"하나님이 손을 깨끗하게 해 주기로 작정하셨다면 굳이 닦지 않아도 말끔해질 것이다."
저자는 루이스의 독특한 생각을 더 확장시켜 나간다.
창조주는 뭔가를 간단히 조작해서 음식을 먹지 않아도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서 저절로 영양이 공급되며, 공부하지 않아도 지식이 쌓이게 만드실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대리자를 세우고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파트너십을 채택하셨다.
파스칼의 표현대로, 사랑하는 인류를 위해 "인과율의 권위"를 인정해 주시기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연극 자체에 영향을 미치게 하고 배우들의 행동을 모두 조화시켜 최종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극작가 처럼 일하신다.
이렇게 C.S 루이스는 인류의 역사의 드라마를 '작품'으로 규정하면서, 그 안에서 기도의 자리를 찾았다.
"인류의 역사는 줄거리를 이루는 장면들과 전반적인 틀은 작가가 확정해 놓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세부 묘사는 배우들이 즉석에서 처리하도록 만들어진 연극이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에 개입하게 하신 이유는 언제까지나 수수께끼로 남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그런 일들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만큼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상화 관계 속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솔직함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고통스러운 길을 '사랑의 선물'로 합리화 하며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도를 버리는 게 올바른 기도 방식이다.
고대 예언자들은 주님의 가혹한 심판에 대해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대신 '뜻을 바꾸어 주소서'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설령 상대가 주님이라 할지라도 결코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의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현실을 잠자코 받아들일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성품을 일일이 짚어 가며 해명을 요구해야 한다."
E.M 바운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과 싸우는 씨름꾼의 마음가짐을 가질 때만 가장 고상한 기도를 드리고 가장 위대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정직하게 간구하는 신자는 그 간구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기도는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아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뜻은 이러한데 하나님의 뜻과도 이러저러하게 맞지 않는지 여쭤볼 수도 있다.
내 뜻을 처음부터 뭉개 버리고 없는듯이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내 문제가 무엇인지 감지할 수 없다.

하나님이 좋아하실 만한 기도만 드리려는 마음은 인격적으로 서로 소통하며 교제를 나누려는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과 대화로 교제하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솔직히 말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말로 내 뜻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복종하게 되는 통로가 기도다.

"견고한 신앙은 기도하는 이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공동 작업에 필요한 것들을 구할 때만 생긴다. 하나님과 긴밀하게 동역하는 이들일수록 그분이 세상에서 성취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할 능력이 점점 커지게 마련이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거기에 맞춰 기도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을 조종해서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연못에 한 방울의 사랑을 보태어 그 동심원의 폭을 넓힐 따름이다."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길
기도는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길이다.
그 만큼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소홀히 여겨지기 쉬운, 그래서 더욱 힘든 어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보여 준다.

성막의 구조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아무렇게나 만날 수 없다는 진리를 드러낸다.
그렇게 하나님을 내 맘대로 만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인 기도 역시 내 맘대로 못한다.
사실 기도가 단순한 요청의 도구가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분과 상호 교감하는 만남과 교제의 통로라면,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기도를 내 뜻을 관철시키거나 내 유익을 도모하는 도구로 삼으려 한다면,

이미 그 동기 자체가 기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기도는 내 존재를 드려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나는 통로다.
그래서 존재를 가진 자는 누구나 기도할 수 있지만, 존재 보다 소유에 욕심을 내면 기도하기 어렵다.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이 얼마나 오묘하고 위대한 분인지 잘 모른다.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일들을 경험하며 오히려 그분이 나보다 얼마나 크신지를 체험한다.
기도를 거절당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내가 누구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결국 기도는 존재의 문제이자 일상 그 자체와도 연결된다.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며 기도이다.
그래서 기도가 깊어지면, 믿음도 전인격적으로 깊어진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만들어낸 특정한 개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참되고도 유일한 예배의 대상에 대한 상호 인격적인 관계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주고, 그분의 관점을 가지고 나와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믿음을 성숙시킨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내 모습 그대로를 정직하게 노출시키며, 내 안에 있는 소원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사모하게 해 준다.
그 사랑의 교제로 인해 하나님을 닮아 가는 변화를 경험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매개체가 기도다.
기도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는 기독교 복음의 정체성을 바로잡아 이 시대 그리드소인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해 줄 것이다.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인 동시에 창조주라 할지라도 억지로 요구할 수 없는 선물은 바로 사랑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아이들이 스스로 보여주는 사랑이야말로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며, 강요해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사랑을 명령하셨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강조하셨다.
오직 기도하는 가운데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하신다.

  • Yes
  • No
  • Wait
  • More than
  • Another Way

인간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하고, 들어주시지 않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100%응답해 주신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깨달을 때 기도의 깊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C.S 루이스의 기도문으로 마무리 하기를 원한다.
"나는 내 자신을 도울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나는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나는 나의 삶의 모든 순간에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나의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15:7)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한일서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