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자료

예수의 기도(prayers of Jesus)

대 덕 2024. 6. 17. 06:41

기도의 역사와 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하신 기도들이
그 주제를 설명하는 데 주는 도움이다. 예수의 기도들은 주기도문이 양식에서 발견된 기도에 관한 그의 교훈과 관련시켜서,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일반적인 말씀들과 암시적인 충고에 관련시켜서 연구되어져야 한다.

1. 주기도문
주기도문이 양식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마6:9-13 눅11:2-4). 이 두 형식의 차이는 주기도에서 어구의 정확한 모방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주기도는 찬양, 하나님 나라의 임재에 대한 탄원, 개인의 필수품에 대한 염원, 용서, 유혹에서의 해방에 대한 기원, 송영을 포함한다.

주기도문은 개인적인 동시에 보편적이다. 그 기도는 신적인 것들에 관한 승인을 제일 앞에다 위치시키고 있지만 삶의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2. 기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
사람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마 6:5). 기도의 신성함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은밀히 하라는 명령(마6:6), 기도의 간절함(눅11:5-9, 18:1-8), 겸손이라는 기도의 필수적인 조건들 즉 자만의 배제(눅18:9-14), 과시와 중언부언의 배제(마6:7), 신앙과 용서정신의 필요성(마11:24-26), 그리스도의 의지에의 복종, 즉 '나의 이름으로'(요14:13) 등에서 볼 수 있다.

3. 그리스도가 하신 기도들
마11:25,26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감사한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 이다." 이 말은 기도의 본질이 단순히 필요의 표현과 필요로 되는 것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의 의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기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보다 깊은 아들의 아버지 경험을 통찰하게 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조차도 감사함으로 아버지의 의지에 완전히 복종한 그의 복종을 통찰하게 한다. 따라서 위의 인용된 그리스도의 감사기도는 기도의 최고 형태가 맑은 영혼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마14:23은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신 주님의 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지만 그 기록은 시사적이다. 예수는 극심한 고통과 소용돌이의 하루를 지낸 후에 기도하러 가셨다. 실재성, 즉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성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마11:25, 26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숭고한 사귐에서 아버지에게 간구하는 성자의 기도로 거의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마 14:23은 인자의 기도하는 장면을 강조하고 있다. 바다 위를 걸으시는 기적(신성에 의거하여 성취된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의 인격 안에서 수행된 기적의 예)과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기도사건의 결합은 자연과 초자연의 관계에 관한 흥미 있는 문제를 제시한다.

아마도 여기에는 기적의 참 의미에 대한 설명이 있는 것 같다. 지고한 아버지와 주님의 사귐으로 인하여 예수의 육체적 속성은 영적 능력이 채워지게 되었다

그 영적인 능력은 물질세계에 대한 영적인 지배력을 확장하여 인간의 정상적이고 죄 많은 상황에서 인간의 속박하고 있는 한계상황들을 극복하였다(마 15:36, 14:19). 그리스도께서 식사하시며 감사하신 것이나 '복을 기원하심'에서 보여 주는 양식 공급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현대에는 주로 무시되거나 단순한 형식으로 되풀이하는 식사기도의 모범적인 예로써 주목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의미심장하다. 이 그리스도의 인식은 그 안에 언제나 내재한 강렬하고 가장 놀라운 신 인식을 표현한다. 기도는 이 신 인식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 신 인식은 공동식사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적절하게 환기되어진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귀머거리)에게 이르되 '에바다' 하시니"라는 막7:34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마17:21에서 우리 주님이 기도를 기적적 능력을 행사하심과 관련하여 자신의 기도를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요11:41,42에서 명백하게 암시되고 있다. 비록 요11:42,42의 예수의 기도내용은 위에서처럼 그리스도와 성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 그와 같은 관계는 기도의 본질이며 그와 같은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언제나 하나님 자신의 가장 완전한 능력을 행사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마19:13에 보면, 예수께서 손을 얹고 기도해 주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여기에서 예수가 기도했다는 것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5절은 그가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손을 얹었다는 것으로 미루어보다 안수하고 기도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장면은 우리 주님의 말씀에 미루어 볼 때 가장 많은 암시를 해주고 있다. 마26:26에 보면 우리 주님은 만찬석상에서 떡을 떼어 축사하시거나 또는 감사하신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널리 채택된 성만찬의 모범을 보여주셨으며 예배 시에 '유카리스트'(감사기도)란 용어를 제공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1)대제사장의 기도
대제사장적 기도(요 17장)는 주님의 특별한 기도이며 우리 주님의 기도 내용이 절차에 대하여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준 유일한 실례로 간주될 수 있다. 마11:25의 감사기도는 예수의 기도들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 요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제외하고는 길이가 어느 정도 긴 유일한 본보기이다. 그러나 그 감사기도조차도 여기에서 주어진 대제사장적 기도와 비교 할 때는 간결한 것이다. 이 기도의 내용으로 보아 그 기도는 제자들이 듣는 데서 되어 진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기도와 제자들의 관계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듣는 자들인 그들은 그 기도에 참여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 기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와 예수가 그때까지 수행해 왔던 과업의 성격 및 앞으로 제자들이 그 과업에서 맡아야 할 역할을 모두 그들에게 계시해 주었다. 요한은 그 기도가 어디에서 되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암시도 주지도 않는다. 요14:31은 예수께서 다락방에서 떠나신 것을 의미하고 알려준다.

그러나 이 기도는 분명히 15장과 16장의 강화들이 행해진 곳에서 드려졌음이 분명하다. 웨스트코트(Westcott)는 성전 뜰 안에 있던 어떤 장소가 15,16,17장의 내용이 형성된 무대였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흔히 성전에 있는 황금 포도나무 장식이 주님으로 하여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하도록 연상 작용을 한 것이라고 말해 온다. 또한 요 18:1은 이 기도가 주님과 그의 제자들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기 전에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이로써 볼 때 15-17장의 말씀들이 성전 근처에서 수행되었으리라는 가능성 밖에는 정확한 지점의 결정은 확실히 불가능하다.

이 기도의 첫 부분(요17:1-5)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분명한 교제에 대한 표현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리라는 바람의 기도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아버지 자신의 영광이 궁극적 목적임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절대적으로 유일한 성격은 4절의 침착한 단언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임무를 완수했다는 4절의 그리스도의 자각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최상적 본성을 나타낸다.

이 기도의 두 번째 부분(17:6-19)에서 우리 주님은 그가 자신과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시해 준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7,8절). 그는 그들이 아버지에 의해 보호될 것과 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들이 세상과 결별한 사실이 선언되고(14절) 또한 그들이 자신들에게 낯설고 주님 자신에게도 낯선 세상에 있는 악으로부터 보호되어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 기도의 셋째 부분(요17:20-26)에서는 그리스도와 그를 궁극적으로 따르는 자들과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다. 그들의 일치는 외적인 일치가 아니라 그들 안에 주님의 거하심과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거하심에 의해 발견되는 깊고 영적인 일치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기도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식이 그의 백성들에게 계시된다는 것과, 모든 것의 마지막과 절정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심으로 인해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는 것을 선언함으로 끝난다.

이 기도는 단순히 우리 주님의 기도들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인류의 기도들 가운데서도 그 유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이 기도는 분명한 간구인 한편의 대화이다. 한두 곳에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시는데 이같이 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이 승리의 기도의 내용, 즉 그 안에 있는 모든 간구가 실제로 그 간구의 실현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의 선언인 이 기도의 내용은 겟세마네 기도 직전에 있던 것으로, 난해한 면과 암시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기도의 이례적인 면은 역사적 실재(이 세상에서 제자들이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한 강력한 주장이다.

한편으로는 세상과의 결별을 말씀하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역사적 실재를 강력히 옹호하시는 주님의 모순적인 분위기에 대한 설명은 우리 주님의 본성의 깊이, 특히 그의 이중적 본성 중 그의 개별적 본성이 속해 있는 국면들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는 지고한 하나님이시고 또한 최대의 인간이시다. 그 기도와 그 기도에 나타난 예수의 조용한 확신을 충분히 파악하게 될 때 신자는 끊임없고 무진장한 위로와 용기의 원천을 발견할 것이다. 이 기도가 제공해 주는 교회의 역사와 경험에 대한 괄목할 만한 예견에 우리는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 겟세마네의 기도
이 기도는 세 명의 공관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기록 되고 있고(마26:36-44, 막14:22-40, 눅22:39-46) 그리고 히5:7에서 언급된 기도가 바로 이 기도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기도는 간결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가장 분명한 인정, 그 기도에 의해 추구되는 명백한 목적, 하나님의 의지에의 완전한 복종을 드러내 준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언급 하는 모든 기도의 요소들 가운데 용서를 간구하는 내용 이외의 모든 요소들이 여기 포함되어 있다. 이 기도가 세 번 반복되어졌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이 사실은 중언부언하지 말 것을 금하신 주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금하신 것은 공허한 반복이었다. 여기서 세 번 반복하신 사실을 언급한 것은 이로써 기도의 강도가 강렬하였음을 표현한 것이다(참조. 고후12:8에 있는 육체의 가시에 관한 바울의 기도).

(3)십자가상의 기도
마27:46, 막15:34에 보면 그리스도는 시22:1의 기도를 사용하신다. 완전한 외로움의 순간에 고난 자(sufferer)는 자신의 하나님과의 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주장하신다. 이것은 대속 적 희생물의 승리이다.

눅23:34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을 위하여 중재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다. 46절에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에게 위탁하는 고요한 위탁이 있다. 여기서 기도는 다시 승인과 신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가장 지고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같이 하여 십자가상에서의 세 기도는 우리 주님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기도를 예시해 주기도 한다.

그 세 기도들은 기원, 중보 그리고 친교를 나타낸다. 따라서 기도는 우리의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표현하며 우리의 신뢰, 우리의 사랑, 우리의 필요를 표현한다. 예수는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십자가상에서의 그의 기도들은 그의 대제사장적인 직무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직무는 그처럼 극도의 위기에서도 최고도로 발휘되고 있으며 최고의 활약상이 나타나고 있다.

(4)부활후의 기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가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엠마오의 만찬석상에서 그는 떡을 들어 '축사하였다'(눅24:39). 리고 승천도 축사하시는 가운데 있어졌는데(눅24:51) 이는 승천 이후 교회의 전 과정이 주님의 축복 아래 깃들어 있으며 최후의 성취 때만이 끝날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물고기와 당밀(영어로는 hon- eycomb을 번역한 것으로 KJV에 나오고 한글개역에는 없다)을 잡수시는 행위(눅24:43)에는 특별한 종교적 형태의 어떤 행위가 수반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가복음은 세부적인 것들에 대한 독특한 관심 때문에 그리스도의 "하늘을 우러러 보신" 사실을 기록한다(막6:41, 7:34). 요 11:41은 이와 유사한 행위를 언급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들어 주셨음을 감사하는 주님의 말씀을 덧붙인다.(요17:1을 또한 참조하라). 하늘을 우러르는 자세는 그리스도의 기도들에 있어서 상례적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세는 적절하고도 암시적인 것이었다.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 기도하셨다는 것(눅3:21)과 그가 열두 제자를 선택하기 전에 기도로 밤을 지샜다는 것(눅6:12,13)과 변화되시기 이전에 그가 기도하신 사실(눅9:29)을 서술하며 감람산에서의 기도를 기록 한다(눅22:41-45). 이같이 세 번째 복음서 기자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도 기록한 우리 주님의 외딴 곳에서의 기도를 언급한 것 외에 기도와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들과의 특별한 관계의 실례들을 첨부 하고 있다.

(5) 반적인 결론
그리스도께서 하신 기도들에 관한 기록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기도에 관한 결론들이 유도될 것이다.
1)기도는 인간의 영적인 본성의 최고의 행위이다.
2)그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룬 상태에서도 영혼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3)그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기를 바라는 요구의 표현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보여준 대로 신뢰와 복종,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의 최고의 표현이다.
4)기도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으로 모두 행해져야 한다. 기도는 개인적인 동시에 중보 적이다.
5)기도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간구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기도의 방향을 잡아주는 규정들이다. 말하자면 기도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중재에 근거되어져야 하며 주님의 왕국과 그의 선한 목적의 한계 아래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선한 목적은 전체 왕국의 유익을 조건으로 하여 기원자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