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the Golden Rule)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는 예수의 계명(마7:12, 눅 6:31)에 대한현대적 명칭을 말한다.
이 명칭이 어떻게 유래되었는가는 불확실하다. 이 계율은 일찍이 1674년에 '황금률'로서 인용되었다.
'황금'은 측량할 수 없는 가치와 효용성을 의미하고, '율'은 법적인 규정이 아닌 이상적인 도덕적 원리임을 말해 준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둘 모두에서 이 계율은 예수의 강화 중에 앞서 말한 가르침을 요약해서 마무리짓는 말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말씀이 나타나고 있는 문맥은 각기 다르다. 마태는 기도에 관한 예수의 몇몇 계명들을 이 계율로 끝맺고서 이렇게 부언한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누가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 및 증오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마무리짓는 위치에 이 계율을 두고 있으나 율법과 선지자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이 황금률은 예수가 옛날의 유대 교훈들을 그 자신이 독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대접을 받는 자보다는 대접을 하는 자를 칭찬한다. 이 계율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그것의 보편적 적용 범위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교제관계가 다 포괄된다. 그것의 단순성은 어둡고 복잡한 인간관계들을 꿰뚫는 한 줄기 밝은 빛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예수의 여타의 가르침 및 행동으로 보인 예수 자신의 귀감과 성관관계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계율이 기독교적 삶을 위해서 합당한 지침으로만 머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모든 인간 상황에서 창조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의 진리는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모든 타산을 초월하여 상호의 이익을 추구하게 만든다.
기독교인들은 이 계율의 적극적인 형태를 선호하고, 유대인들은 소극적인 형태를 선호한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를 논의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양 종교가 다 황금률을 하나님의 의지로서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시대 및 그 이전의 유대 문서에서 이 계율의 소극적인 형태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이 계율에 대해서 외토 4:15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라." 그리고 아스테아스 서간집 207에서도 이 계율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적극적인 형태에 접근하고 있다. 그밖에 율법 전체를 빠른 시간에 가르침받기를 원하는 이방인 질문자에게 준 힐렐의 답변(사바 31a)에서(힐렐은 또한 이 계명이 '율법 전체'라고 선언하였다), 팔레스타인 탈굼(예루살렘 I) 레 19:18의 끝부분에 나오는 이웃 사랑하기에 대한 설명에서, 그리고 필로의 저서(Euseb. Preparation VIII.7.6에 의해 인용된)에서도 이 계율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웃에 대한 사랑과 "네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너에게 소중한"(아보2.10,12; 참조. 외집 31:15) 그의 명예 및 재산에 대한 존중은 이 계율의 적극적인 측면들도 또한 가르쳤다고 하는 것을 암시해 준다. 초기 기독교 문서들에서도 이 계율의 소극적 형태가 나타나는데, 아마도 이것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한다는 바울의 진술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롬 13:10). 디다케1:2에서는 이 계율이 소극적 형태로 진술되어 있다. 여기서 그것은 하나님 및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는 '생의 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또한 행 15:20,29의 서방 본문(베자사본)에서도 이 계율이 나타난다. 여러 교부들은 이 계율의 적극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수많은 인용구들을 복음서들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비록 예수가 황금률에 언어적 표현을 부과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은 많은 민족의 윤리적 및 종교적 가르침들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공자는 이 계율의 소극적 형태를 가르쳤다. 이 계율에 다소 유사한 행위 규범들이 초기 그리스인들 및 로마인들의 문헌들에서 그리고 힌두교와 불교와 이슬람교의 교리들에서 발견된다.
1. 배경:
남에게 대접받고 싶어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적극적인 형태 및 소극적인 형태로 명령하는 격언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소피스트 운동(주전 5세기 말엽)의 결과로 생겨났다. 그것은 통속적 도덕을 날카로운 경구의 형태로 표현하기를 즐긴 소피스트들의 취향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철학적 윤리학의 표현이 아닌 통속적 도덕의 표현으로서, 도덕적 행위의 세계에서는 책무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해에서 생겨난 개념인 고대의 응보 혹은 상호성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황금률은 그리스 및 헬레니즘의 철학적 윤리학이 선 자체를 추구하느라 재빨리 초월하였던 피의 보복같은 원시적 개념들과 관계가 있다. 상호성을 계발하고 통제하는 선의 개념이 또한 개재되지 않는 한 황금률은 분명히 행위의 지침으로서는 부적합하다. 분명한 실례를 들어 말하면, 이 계율을 우직하게 따르는 피학대음란증 환자는 도덕적 대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 문헌에서 황금률은 헤로도투스의 저작(III.142; VII.136)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그는 소피스트들의 영향을 받았다. 주전 4세기 이후에 황금률은 수사학파들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 및 라틴 문헌에서 발견되는 격언적인 통속적 윤리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었다. 그러나 철학적 저술들의 대부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참조. Aristotle's Rhetoric II.vi.19). 그것은 헬레니즘시대 이전의 유대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아리스 207; 외토 4:15). 비록 신 15:13같은 본문들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황금률이 소피스트들에 의해 형성된 그리스의 통속적 도덕의 산물이며 헬레니즘 시대에 유대사상이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초기 기독교문헌에서 황금률은 보편적으로 나타났는데 그 대부분은 소극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2. 신약에서:
(1) 누가복음:
황금률은 제3복음서의 난해한 문맥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권면의 일부로 나온다(눅 6:27-36; 참조. 마 5:38-48). 31절에서 이 계율이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호성이 그 바로 뒤를 잇는 구절들(32-34절)에서 비난을 받는다. 황금률은 27-30절에 대한 다소 부정확한 요약으로 보인다. 이어 32-34절은 그것을 그것에 따르는 상호성의 요소를 극소화하는 방법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누가는 헬레니즘의 철학적 윤리학 일반과 마찬가지로 황금률의 비교적 소박한 통속적 윤리를 원수에 대한 사랑의 급진적인 종교적 윤리에 의해 초월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가의 사상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예수에 관한 전승과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철학적 문화가 지니고 있는 인도주의적 풍조이다.
(2) 마태복음:
마태복음에서 황금률은 그것에 앞서 나오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요약한다. 데비스(Davies)는 산상수훈 중 5:17-7:12까지의 부분은 유대교의 세 기둥(아보 1.2)-율법과 예배와 자비행위-에 대한 대응물로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5:17-48에서는 예수의 율법을, 6:1-16에서는 진정한 예배를, 그리고 6:19-7:11에서는 자비행위를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7:12에서 황금률에 의해 요약되며, 이것은 다시 '율법과 선지자'의 요약으로 불리운다. 이 진술(houtos gar estin ho nomos kai hoi prophetai: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은 5:17-18의 초두 부분 및 22:40의 두가지 큰 게명을 생각나게 한다. 황금률을 '율법과 선지자'라 칭하고 그것을 선행하는 설교와 연결지음으로써 마태는 누가와 마찬가지로 소박한 상호성의 윤리를 바로잡는다. 그들은 황금률을 선의 내용에 대한 분명한 진술과 연결짓고, 그럼으로 해서 상호성이 지도되고 통제될 수 있는 선의 이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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