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한국 교회의 역사

대 덕 2024. 8. 1. 07:45

1. 한국 교회 역사
한국의 교회 역사는 기독교의 도입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17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하였으며,
그 이후로 한국 사회 및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은 한국 교회의 주요 시기와 발전 과정입니다:

1) 조선 시대 (17세기 후반 - 19세기 초반):
기독교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반도에 도착하였고,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처음에는 천주교 선교사들이 주로 활동하였으나, 18세기 후반에는 개신교 선교사들도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신앙 생활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며, 유학과 병원, 사회 복지 등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 일제 강점기 (1910년대 - 1945년):
일본 식민 지배 속에서 교회는 억압을 받았지만, 독립 운동에 많은 지원을 제공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교회 내부에서도 독립운동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1950년대):
한국 전쟁 이후, 교회는 재건과 복구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교회의 확장과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3) 현대 (1960년대 이후):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빠른 산업화와 발전과 함께 교회는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다양한 분파와 전통을 가진 다양한 교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기 다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 역사를 통해 한국 사회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으며, 기독교가 한국 사회 및 문화에 미친 영향은 깊고 넓습니다.

2. 조선 시대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삼은 시기로,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시기는 18세기 말입니다.
조선시대의 교회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초기 전래기, 박해기, 그리고 공인기입니다.

1) 초기 전래기 (18세기 말 - 19세기 초)
기독교가 처음 조선에 들어온 것은 18세기 말, 천주교(가톨릭)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비밀리에 이루어진 신앙 활동입니다.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교리를 전파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승훈, 정약용 등이 있습니다.

2) 박해기 (19세기 초 - 1886년)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유교적 가치에 반하는 이단으로 간주하고 강력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특히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가 대표적입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교회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3) 공인기 (1886년 이후)
1886년 조불수호조약(조선-프랑스 조약) 체결 이후, 천주교는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천주교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교회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교육,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펼쳤습니다.

4) 개신교의 전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개신교(프로테스탄트)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1884년 알렌(Horace Newton Allen)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신교는 교육과 의료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의 학교가 설립되었고, 제중원 등의 병원이 운영되었습니다.

5) 결론
조선시대의 기독교 역사는 천주교의 비밀 전래와 박해, 그리고 개신교의 공식 전래와 공인 과정을 거치며 발전해왔습니다.
이 시기의 기독교는 조선의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3.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1910-1945)는 한국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 동안 한국의 기독교는 식민 통치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운동과 교육, 사회복지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교회 역사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초기 일제 통치기, 3.1 운동과 교회의 역할, 일제의 탄압과 신사참배 강요, 그리고 해방 직전의 상황입니다.

1) 초기 일제 통치기 (1910-1919)
일제 강점 초기, 교회는 식민 통치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했습니다.

- 개신교: 교육과 의료 활동을 통해 민중에게 다가갔습니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의 학교는 민족교육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또한, 선교사들은 한국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 천주교: 천주교는 상대적으로 신중하게 대응했지만, 교회와 성직자들은 민족의식 고취와 사회복지 활동에 기여했습니다.

2) 3.1 운동과 교회의 역할 (1919)
1919년 3.1 운동은 한국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 참여와 희생: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당했습니다.
- 민족운동: 3.1 운동 이후 교회는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학교와 병원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장소로 기능했습니다.

3) 일제의 탄압과 신사참배 강요 (1920-1945)
1920년대 이후, 일제는 기독교를 더욱 강력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 탄압과 검열: 교회의 활동은 지속적으로 감시되고 탄압을 받았습니다.
특히, 민족운동과 관련된 활동은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 신사참배 강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이는 일본의 국수주의적 종교의식을 강제하는 것이었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에 반대하여 박해를 받았습니다.
일부 교회는 이에 순응하기도 했으나, 많은 교회는 저항했습니다.

4) 해방 직전의 상황 (1945)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 해방 후 교회: 해방 이후 교회는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해방 후의 사회 재건과 교육, 의료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5) 결론
일제 강점기의 한국 교회는 민족운동과 사회적 기여를 통해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기의 교회는 식민 통치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교육과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 민중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4. 현대
현대의 한국 교회 역사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포함하며, 급속한 성장과 함께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이를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초기, 한국 전쟁과 복구, 1960-70년대의 급성장, 1980-90년대의 다변화,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변화와 도전입니다.

1) 해방 이후 초기 (1945-1950)
- 교회의 재건: 해방 후 한국 교회는 일제 강점기 동안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가 다시 문을 열고, 교인 수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 교육과 복지: 해방 후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교회는 교육과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독교 학교와 병원이 설립되고, 난민과 고아들을 위한 지원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2) 한국 전쟁과 복구 (1950-1960)
- 한국 전쟁의 영향: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은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교회 건물이 파괴되고, 교인들이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교회는 피난민들을 돕고, 전후 복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선교 활동: 전쟁 후,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교회의 지원이 크게 증가하였고, 이는 한국 교회의 성장에 기여하였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복음 전파와 사회복지 활동에 힘썼습니다.

3) 1960-70년대의 급성장
- 경제 성장과 교회 성장: 1960-70년대의 경제 성장과 함께 교회도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대규모 교회들이 설립되고, 교인 수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 교회의 사회적 역할: 이 시기 교회는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기독교 학교와 대학, 병원이 설립되었고, 이는 한국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4) 1980-90년대의 다변화
- 민주화 운동과 교회: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교회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싸웠으며, 교회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 교회의 다양화: 1980-90년대에는 교회의 활동이 더욱 다양화되었습니다.
청년 사역, 문화 사역, 사회복지 사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5) 2000년대 이후의 변화와 도전
- 성장의 둔화: 200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성장의 둔화를 경험했습니다.
교인 수의 정체 또는 감소, 젊은 층의 교회 이탈 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 사회적 도전: 교회는 새로운 사회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세속화, 물질주의, 종교 다원주의 등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신뢰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 혁신과 변화: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교회는 새로운 형태의 사역과 혁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예배, 소그룹 사역, 사회적 기업 활동 등이 그 예입니다.

6) 결론
현대의 한국 교회는 해방 이후 급격한 성장과 함께 사회의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며 발전해왔습니다. 교회는 교육과 사회복지, 민주화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현재는 새로운 도전과 변화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사란?
한국이라는 역사적 삶의 터전, 즉 언어, 문화, 역사를 공유하는 민족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 왔던가에 대한 기록
한국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역사/ 개별교회의 고유성과 독특성 있다.
독특성은 고유성 안에서 확인!

2. 한국교회 전래 (천주교, 개신교)
일반적으로 한국과 천주교회와의 첫 접촉은 1593년 임진왜란을 통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성리학에서 실학으로 관심 이전 실학을 받으면서 서학에 관심 많이 가지게 됨(대표적으로 선조때)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소현세자 청나라로 인질로 잡혀가 중국에서 아담셀 신부 만나, 천주교 받아들임
처음엔 학문적 열심에서 그리고 나중엔 종교적 열심으로 이벽, 정약전같은 사람에 의해 발전, 이승훈 받아들임

주로 역관 출신, 중인들 쉽게 받아들임
대표적인 사람, 김범우(중인)! 자신의 집에서 미사를 드림
김범우의 집에 명동성당 세워짐
특징은 선교사가 들어와 복음이 전파된 것 아니라 처음엔 학문으로
그러나 나중엔 복음으로 받아들이게 됨
초기 천주교가 들어올 땐, 문화 존중 차원에서, 제사 지낼 수 있다고 받아들임
그러나 윤유희란 사람이 중국에 건너가 로라 신부를 만나면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우상숭배!
양반중에 많은 사람이 탈퇴!

정조때
서학을 따라 들어온 학문과 남인중심으로 천주교 확산(4천명 -> 1만명정도)
정조때 남인계열 등용, 이때 일사추조 적발사건(1785)

김범우 집에서 미사집행. 발각,
양반들은 훈방조치,
중인들은 고문, 귀향. 순교!
양반계층 배교

순조때 (1800-1834) 11세때 즉위,
영조의 왕비 정순왕후 남인계열 사람들과 관계 안 천주교인들 박해 더 심해짐,
이때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권철신 등 3천명 신도와 청나라 신부 주문모 순교 당함.
정약전, 정약용 등 유배

현종때
온화한 정치, 프랑스 선교사 활동, 순교
최초의 신부 서품받은 김대건 신부 순교!

철종때
철종 주위에 천주교인 좀 있었지만 그리 심한 박해 없었음

고종때
대원군 쇄국정책.
병인박해 1866-73.
8년동안 프랑스신부 및 8천여명 처형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남연군묘 도굴사건,
척화비 고종
조불수호 통상조약 맺음 특이한 것,
조약 전문 9:2에 '교회" 항목 넣어 조선정부로부터 포교권 인정받음

개신교의 시작, 천주교보다 늦게 들어옴
박해를 통해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
1832년 칼 귀츨라프 목사(독일, 루터교 목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개신교 선교사
그는 순조왕에게 한문으로 번역된 두권의 성경과 교리서들을 진상했다.

한국을 방문한 두 번째 선교사는 토머스 목사였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타고 교역을 요구.
국법으로 금지,
대동강 하류로 이동 중 좌초,
수비병의 화공으로 배 불타고 선원들은 살해됨,
1866. 9. 4일 순교!
그가 건내 준 성경으로 벽지 발랐고 복음이 전파
그 당시 만주에 머물고 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란 분이 있었는데
그는 1874년 4월 이응찬을 만나, 한글을 배우게 되고,
이응찬의 소개로 김진기, 이성하 백홍준 세명의 의주 청년들을 만나게 된다.
로스 선교사의 궁극적 목표는 한글성경번역!
이 만남을 통해 4사람은 믿음을 갖게 되고, 1879년 세례를 받게 된다
그 이후 인삼 행상인이었던 서상륜을 만나 복음이 전파되고,
성경인쇄를 위해 채용되었던 김청송 또한 세례를 받게 된다.

이처럼 한국인 첫수세자 6명 탄생되고.
이후 1882년 최초로 번역된 한국어 성경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셔" 성경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만주에서 한글성경이 번역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 성경번역이 시도되고 있었다.

1887년 한문성경에다 한글 토를 단 마가전, 마태전, 누가전, 요한전, 사도행전 출간,
이수정은 일본에서 성경번역외에도 한국 복음화를 위해 노력했다

19세기 말은 역사의 격변기! 개국과 개항!
1863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75년 (고종12년) 운양호 사건,
일본은 조선의 문호개방을 위해, 조선 해안측량이란 이유로 운양호 보내 해안선 측량 우리나라 수비군과 충돌, 이를 트집 삼아 통상 요구, 강화도 조약.
최초의 불평등조약 이로인해 개국, 개항,
이런 일련의 변화가 조선에 기독교 선교 가능케

1876년 수신사란 이름으로 외교사절 파견,
1881년 신사유람단 일본 파견,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1883년 미국공사관 설치,
1884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조약 체결,
1886년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벨기에와 조약체결

조선은 국제무대에 그 모습 드러내기 시작
쇄국의 빗장이 열리자, 선교사들의 내왕이 가능하게 됨,

기독교 선교는 점차로 이뤄짐
1876년 개항은 기독교의 한국선교를 가능케 해 주는 역사의 전기였다.

1884년 이래로 한국에 여러 선교사들 입국/
미국의 북장로교(1884).
북감리회(1885),
호주장로교(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의 남장로교(1892),
미국 남감리교(1896),
캐나다 장로교회(1898)

이 시기는 미국교회가 한국선교를 주도했다
1880-1890년대 역사와 기독교 / 많은 변화 가져옴

<그당시 우리나라의 상황>
쇄국정책에서 개화정책으로/ 외국 문물, 기술 등 수용
일본이 제국주의적 사고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그런 맘 드러낸 사건이 있었다
청일전쟁(1895)/ 일본이 청나라를 이기게 됨/
우리나라의 모든 권력을 일본이 가져감/
일본 야욕 더 드러냄, 을미사변(1895) 명성왕후 시해후

고종은 그것에 대해 뭐라 말하지 못함
자신의 목숨도 위협을 받음, 위태한 삶
을미사면, 명성왕후 시해사건, 항일운동 시발점,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

서재필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창립 자주국방분위기
대한제국(1897.10월~1910년 8월22까지) 국호바꿈

일본에 의해 결국은 1910년 대한제국 사라짐/
일본의 완전한 지배하에 놓여짐

<이런 상황 가운데 어떻게 복음이 정착하게 되었는지?>
처음엔 선교하는데 많은 제약 있었음,
반기독교적인 정서 많이 형성되어 있었음.
고종이 맥클레이선교사에게 직접선교는 금하고, 간접선교는 허락! 때문.

맥클레이선교사님이, 어더우드 선교사님이나 아펜젤러 선교사님, 북장로교회나 북감리교 회를 통해 교육선교사님, 의료선교사님들을 부르게 되는데, 그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게 되고, 교육도 정착하는데 있어서 프랑스와 조불수호통상조약(86)을 통해 의료선교나 간접 선교를 좀 허용됨!

선교하는데 있어서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씨가 되어 선교하는데 조금 더 문을 열게 되어지 고, 이런 모습 가운데 우리나라 일본에게 많은 자극을 받게 됨.

일본 명성왕후 시해 후, 청일전쟁 승리!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근대화를 빨리 이뤄야!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미국의 선교사님 들어와
교육선교사, 의료선교사 받아들이는 모습 살펴봄
서구의 많은 기술 받아들이고 선교사님들도 받아들임
국민들 인식은 잘 바뀌지 않음/ 그때 1895년 7-8월 콜레라가 발생
제중원의 의료 선교사, 올리버 알 에비슨이 1893년 내한하여 1935년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40여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통해 한국의 의학과 고등 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이로인해 국민들의 인식이 많이 바뀜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한민국에 세를 과시하지만
그러나 그들도 외국 선교사님들에 대해선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
그들은 미국이나 외국. 강대국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본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치외법권에 속한다.
우리 나라의 독립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님들 가운데 많이 피함,
일본의 탄압에서 일시적으로 피할 수 있는 곳
그래서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게 됨

이처럼 우리나라에 복음, 선교가 뿌 리를 내리는데는 직접적인 선교보다는 이런 간접적인 선교가 영향을 발휘하게 됨
한국의 선교는 직접적인 선교보단 간접적인 선교가 더욱더 큰 양향을 끼쳤다.
그리고 종교적인 모습으로, 교회가 더욱 펴져나가게 되는 역할
1900년도 초 영일동맹(1902) 러시아를 막기 위한 영국, 일본동맹
러일전쟁(1904-5) 시발점. 1904년 2월8일 뤼순군항 기습공격 러일전쟁 시발
일본이 승리! 일본 한반도 지배권 획득
카쓰라 태프트 밀약(1905) 일본총리:가쓰라 타로 와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가 체결 내용,

미국이 필리핀 점령하는 것, 묵인/
일본이 대한민국 합병하는 것 묵인해달라!
카쓰라 데프트 밀약을 맺은 후 일본은 대한 민국과 을사조약을 맺는다. (1905)
내용: 일본, 한국의 외교에 관한 모든 사무 지휘감독,
일본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을 보호!
한국정부는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는 외국과 조약 맺을 수없다.
일본정부는 외교에 관한 일, 관리하기 위해 1명의 통감을 두고 언제든지 황제를 만날 권리가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 이미 맺은 조약은 이 조약과 다르게 효력이 있다
을사5적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재순
을사조약을 맺도록 앞장선 사람들,
우리나라 주권은 1905년에 일본에 완전히 넘어갔다.

1906년 통감부설치 통감부를 통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데 발판 삼음.
총독부건물해체(1995)
초대통감으론 이토히로부미(1841-1909)

이런 때 민족운동 발발/
고종은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무효를 네덜란드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한다. 결국 참석치 못해 알려지지 못함
통감인 이토히루부미에 이 사실이 들어가 고종문책 책임추궁 결국1907년 고종은 페위,
아들 순종을 조선의 26대(1874-1926)왕으로 등극
순종 3년간 나라 다스리다가 일본에 완전히 나라 넘겨주게 됨.
일본은 한일신협약(1907) 맺어 다시 한번 을사조약을 강화하는 조약 맺게 됨
1910년도 일본은 한일병합(합방)조약을 체결함으로 완전히 민족 빼앗김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8월 29일 경술국치/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무단 정치를 실시함
1910-1945년 일제 식민지로, 일제 강점기 시대를 보냄
일제는 한일합방조약이후, 그 이듬해 안악사건, 데라우치총독 모살 미수사건등 여러사건 일어남,
105인 사건 98명이 기독교인, 2.8 독립선언과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중 16명 가담
1900년대 암울, 역동적인 시기/
기독교 서양의 종교, 이방의 종교였지만 일제 탄압에 의해 한국의 종교 우리의 종교로 거듭나게
이념적 신앙의 모습에서 체험적 신앙의 모습으로 전환
개인적 신앙에서 공동체적 신앙으로 바꿈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기독교에 관심가지게?
을미사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며 선교사들이 가진 치외법권적 특권,
선교사님들에게 관심,
교회에 많은 사람들 관심,
동도서기적 기독교 (1885)-외국 문물 유입
충군애국적 기독교 (1895) -우리나라에 많은 전쟁
의료선교사님들과 교육선교사님들이 애국애족 모습 통해 민족을 살리는 기독교 여겨짐
1905 평양 대부흥 민족의 대부흥. 출발점: 사경회
보통, 지역. 고급, 특별 성경공부반
보통-농한기엔 성경공부!/
지역-특정한 지역에서/
고급- 여름에 2-3간 공부
특별- 특별반 운영

1890년 언더우드 선교사 자신의 집에서 7명에게 성경공부/
대부흥 운동 발흥
03.24-30 원산/ 하디선교사 모시고 1903년사경회 부흥
1903-6년까지 부흥운동/
감리교중심- 장로교중심/
선교사 중심 - 한국인 중심
1906년 12월 성탄절기념/
1주간 특별 기도회/
평양중심으로 부흥
1907년 1월 2일
15일 평양대부흥운동(장대현교회) 사경회2주간 매일 2천명씩
14일간 길선주장로의 회개, 기폭제

마지막날 밤은 온 회중이 새벽2시까지 눈물로 기도
이후 자발적으로 세계 최초 새벽기도회 / 새벽 1시부터 수백명 모임
인구 2% 자신의 잘못, 사회, 직접 고백/ 평양 예루살렘/ 고백과 보상까지

통성, 중보기도
신앙운동 통해 기폭제/
뿌리 잘 박히도록/
영적 운동 뿐아니라, 보상 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 통해 바른 성경, 기도, 전도운동/ 큰 동력
대부흥 운동의 모습, 하디 선교사(원산) -평양 거리
길선주 장로, 김익두(1874-1950)목사
신유의 은사활용,
기독교 민족의식, 민족운동 전개
이승만,
구국기도회/ 감리교 청년회, 상소문, 을사늑약 순국 모습
(안중근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