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 일서 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예수를 믿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아야 하는것은,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기에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을 통해서 먼저 성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아버지이심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둘째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 새 번역으로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아버지로 고백하는데, 예수님은 외아들 혹은 유일하신 아들, 주님,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알려면 먼저 예수님이란 이름의 뜻과 또 예수님을 부르는 다른 호칭들, 독생자, 주, 그리스도란 호칭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여호와는 구원
예수란 이름의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란 이름은 헬라어인데 히브리어로 “예수아,” “여호수아”입니다. 마태복음은 그 이름을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태복음 1:21)라고 풀어 설명했는데 그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이름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모세’란 이름은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라는 의미로, 나일 강물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가 애굽이란 물에서 백성들을 건집니다. 이것이 출애굽 구원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건짐을 받아 땅으로 올라와 살듯,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백성은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되는데, 그 땅으로 인도한 이는 여호수아입니다. 출애굽 구원을 완성한 여호수아의 이름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입니다. 그 이름이 곧 예수입니다. ‘예수’란 이름은 ‘여호와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고 완성하신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창조주가 구원주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가 구원하시는데, 그 구원하시는 여호와가 창조주였다는 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된 세상과 사람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자 고장 난 기계를 버리지 않으시고 ,죄를 지어 타락한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즉 창조하신 하나님이 또한 구원하시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창조주이면서 곧 구원주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창조하신 여호와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시는데, 성경 이야기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서 타락한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일까요?
사람의 아들이 되심.
하나님의 품 속의 독생자
예수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름을 가진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천사가 붙여준 이름입니다. 어떻게 요셉이란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이 그 이름의 뜻처럼 여호와의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단지 사람의 아들만이라면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는 여호와의 구원을 이룰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여호와의 구원을 이루려면 사람의 아들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성경의 다른 구절들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릅니다. ‘독생자’란 말은 외동아들이란 생각이 들게 합니다. ‘독생자’의 ‘독’은 ‘자’를 수식하지 않고 ‘생’을 수식하는 단어입니다. ‘독자’란 의미가 아니라 “유일하게 존재하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원어 “모노게네스”에서 “모노”는 “유일한” ‘게네스’는 ‘제네시스’ ‘태어난’인데, “유일하게 존재하시는 분”이란 말이고 사도신경의 새번역은 “그의 유일하신 아들”로 번역했습니다.
요한복음의 구절을 보십시오.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1:18) 예수님은 원래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구절은 하나님 아버지와 가깝고 친밀함을 뜻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분은 또한 “독생하신 하나님”입니다. 직역하면 “독생자 하나님,” “유일하신 아들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인간 아버지와 아들은 다르지만, 인간이란 동질 생명이듯,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아들도 다르지만,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다른곳에서는 “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 (요한복음 1:18, 현대어)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30).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4:9~10) 이처럼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셋인데 동시에 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는 아버지의 품 속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영원부터 계셨는데, 독생자 하나님은 아버지의 품 속에서 아버지와의 깊은 교제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으로 보내시고, 독생자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으십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아버지가 보내시고 아들이 보냄을 받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여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이 순종하여 보냄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1세기란 시간 속으로 유대 땅이란 공간 속으로 들어오사, 요셉이란 사람의 아들이 됩니다. 그가 사람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유대 땅의 한 위대한 사람의 아들로만 보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런 분은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하고, 예수님 외에는 이런 존재가 없기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독생자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 (빌립보서 2:6~8)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신데 자기를 낮추어 사람의 아들이 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은 더 나아가 죄인 중의 한 사람이 되십니다. “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로마서 8:3) 하나님의 아들에서 사람의 아들로 다시 죄인 중의 하나가 되신 분이 예수입니다.
구원의 길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땅의 사람의 아들이 되고 나아가 죄인 중의 하나가 되어, 1세기 유대 땅 갈릴리 나사렛이란 가난한 동네의 목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가장 잘 사는 나라의 가장 좋은 집에서 살던 왕자가 가장 못사는 나라의 진흙집에 사는 빈민의 아들이 된 것에, 참모총장이 이등병이 된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비유하든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자기 낮춤이고 자기 희생입니다.
문제는 왜 이런 대가를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시고 나아가 죄인 중의 하나가 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죄인 중의 하나가 되지 않고 죄인을 구원하는 길은 없었을까요?
이런 구원의 방식을 취하신 이유를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함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는데,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했다는 의미는, 사람을 로보트가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대화의 상대인 인격적 대상으로, 또한 다스림의 권한을 위임 받은 권위 있는 존재로 창조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대체 가능한 물건이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자녀와 같이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와 인간을 구원하신다면, 그 구원의 방식은 마치 고장난 기계를 버리고 새롭게 만드는 방식일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된 세상과 인간을 버리고 창조 때와 다른 방식의 세계와 인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즉 인간을 자유의지도 없고 아무런 권한도 위임 받지 않은 존재로 다시 만드는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고. 그를 자유를 가진 존재인 하나님의 자녀로, 다스림의 권한을 위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는 그런 구원을 베푸십니다.
마치 왕이 충성된 신하들을 통해서 다스리는 나라를 세웠다가 신하들이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신하들을 다 없애고 혼자 다스리는 방식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을 다시 바르게 세움으로 원래 계획했던 방식의 나라를 다시 재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구원을 위해서는 큰 대가가 필요합니다. 곧 죄인으로 떨어져 버린 사람을 대표하고 대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시고, 나아가 죄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야 그런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이 있어야 세계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원리를 알았던 바울은 말합니다.인간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과 온 피조물도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이때 피조물이 신음에서 벗어나는 구원은 어떻게 옵니까?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가진 인간이 그 권한을 바르게 사용하는 존재로 회복됨을 통해서 피조물도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본모습인데 하나님은 그런 창조의 본모습으로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음하는 “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로마서 8:19) 피조물들이 구원을 얻는 길은 피조물에 고통을 가져온 죄인인 인간을 멸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하나님의 아들들의 구원함을 통해서 피조물의 구원이 오기에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달라고 고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사람이 용서받고 그 사람이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여호와의 구원이 나타나야 세계의 구원이 오는데, 이런 여호와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 구원은 사람의 아들이 되시고 죄인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구원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살림과 영생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고 죄인 중의 하나가 되심으로 여호와의 구원이 임하는데 그 구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 구절을 보십시오.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요한일서 4:9~10)
아버지가 독생자를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보내시고, 나아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화목제물, 즉 죄인 중의 하나로 보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살리려 하심입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독생자가 오셨는데, 살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어떤 모습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것입니까?
또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17)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우리가 영생을 얻고 세상이 구원받기 위함인데,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 죄성의 인간으로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산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우리가 산다는 것,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를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에베소서 1:3~5)
우리가 산다는 것은, 우리들이 다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원을 가져오시는데, 그 구원의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지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8~29).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말씀을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 각자의 실패와 과거와 상처까지도 다 사용하여 마침내 선과 유익이 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선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더 큰 차원에서 생각하면 인간이 역사 속에서 지은 죄가 많고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 많지만, 그 모든 것들까지도 다 사용하여 마침내 하나님이 선을 이루시는데, 그 선은 우리가 다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탕자와 같은 인간의 아들들이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여호와의 구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됨으로 사람의 아들이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죄인인 사람의 아들들이 다시 하나님의 양자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고백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에게만 여호와의 구원이 있음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시어, 죄인 중의 하나가 되신 분은, 오직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떠나서 여호와의 구원은 결코 없기에, 기독교 신앙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이 고백을 통해 구원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 딸들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란 신분을 얻으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대단해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고 산다면 우리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이 고백 속에 담긴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험한 최전방에 보냈는데, 아들이 순종하고 가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도 쉽지 않은데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으로 ,게다가 십자가의 자리로 보내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났고 대단하기에,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건지시려고 할까요? 탕자와 같은 우리가 무엇이 귀하다고 포기하지 않고 이런 대가를 지불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사랑이 사실이고, 그 사랑이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안다면 우리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수많은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알면, 그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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