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갈릴리와 디베랴,갈릴리바다,디베랴바다,게네사렛,긴네렛(긴네롯)

대 덕 2025. 6. 5. 07:52

게네사렛(Gennesaret)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에 위치한 비옥한 평야를 말한다. 구약성경에는 이곳 지명이 ‘긴네렛’으로 나온다(왕상 15:20). 예수님이 이곳에 가셨을 때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지기만 해도 치료받는 기적을 체험했다(마 14:34; 막 6:53).

긴네렛(긴네롯)(Kinnereth)
‘수금’이라는 뜻이다. 갈릴리 바다의 모양이 수금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갈릴리 바다에 대한 원래의 이름이며 민수기 34:11은 긴네렛 못이라고 표현했다. 벤하닷에게 점령된 납달리의 한 지역이며(왕상 15:20) 갈릴리 해변가에 있는 견고한 성읍의 이름이기도 하다(수 19:35). → 게네사렛을 참고하라.

갈릴리(Galilee)
팔레스타인 북쪽을 지칭한다. 히브리어의 ‘갈릴’(galil)이란 말에서 왔으며 ‘원’, ‘순회’, ‘지역’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BC 63년 로마인들이 행정구역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고정된 경계선이 없었다. 갈릴리는 앗수르인들이 북왕국을 멸망시킨 때(BC 734-722)부터 마카비 기간(BC 80)까지는 유대인들에 의해 통치되지 못했다. ‘이방의 갈릴리’(사 9:1)라는 말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1세기의 갈릴리는 길이 약 70km, 넓이 40km2로 204개의 마을을 포함하고 있었다.

예수님과 갈릴리: 숲이 우거진 언덕과 비옥한 평야로 이루어진 갈릴리는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며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사역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래서 이곳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기적 사건들이 복음서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막 1:32-43; 3:10; 6:53-56). 비유들의 대다수 역시 이곳에서 말씀하셨다(마 13:3-8; 막 4:3-8; 눅 8:5-8 등).

갈릴리에 대한 예수님 당시의 견해: 유대와 사마리아를 곁에 끼고 있는 갈릴리는 헬라 - 로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북쪽 지역은 다소 고립되어 있는 편이었고, 거주자들은 유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투리를 사용하거나(마 26:73) 그들의 관습이 유대의 풍습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경멸의 태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무시한 것에도 반영되고 있는데 이는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오지 못한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요 1:46; 7:52; 마 2:23).

갈릴리 바다(Sea of Galilee) = 디베랴 바다(the Sea of Tiberius)
팔레스타인 북쪽에 있는 갈릴리 지역의 호수로 이스라엘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이다. 이 바다는 동쪽의 골란 고원과 서쪽의 저지대 갈릴리를 사이에 두고 북쪽의 훌레 골짜기와 남쪽의 요르단 계곡을 연결시키는 지점에 위치하며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긴네롯 바다’(수 12:3), ‘게네사렛 호수’(눅 5:1), ‘디베랴 바다’(요 6:1; 21:1), 또는 단순히 ‘바다’, ‘호수’라고도 했다.

폭풍이 잦은 이유: 갈릴리 바다와 골란 고원 사이의 1,200m 정도의 급격한 표고차로 인해서 갈릴리에서는 갑작스런 바람과 심한 폭풍이 자주 일어난다. 이것은 북쪽의 헬몬 산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따뜻하게 데워진 호수의 공기와 부딪쳤을 때 생기는 것으로 때로 2m가 훨씬 넘는 파도를 동반한 폭풍이 몰아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런 폭풍은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마 8:24; 막 4:37; 눅 8:22-25).

디베랴(Tiberias)
갈릴리 바다 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현재는 ‘티베리아스’(Tiberias)로 불린다. 구약 시대에는 납달리의 성읍이었다(수 19:35). AD 25년경 분봉왕 헤롯 안디바에 의해 갈릴리와 베레아의 수도로 삼을 목적으로 이 도시가 세워졌고 이 도시 이름은 디베료(Tiberius) 황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곳은 지형상 지리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은 곳이었다. 교통상의 요충지였으며 자연경관도 뛰어나 유명한 휴양지였다. 바다와 산맥으로 둘러 싸여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했다.

이곳의 거주민들은 대개 혼합인종으로 구성되었으며 집정관을 중심으로 6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와 10인 위원회에 의해 다스려졌다. AD 44년까지 헤롯 안디바와 아그립바 1세에 의해 통치되었고 AD 59년에는 아그립바 2세에 의해 다스려졌다. AD 135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도 이곳은 유대교의 중심 도시로 남았다. AD 150년경 산헤드린이 ‘세포리스’에서 이곳으로 옮겨졌고 랍비들의 여러 학파가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팔레스타인 탈무드’가 편찬되었고 ‘디베랴 히브리 모음 체계 구두법’이 세워졌다. 12세기에는 십자군 전쟁터로 변해 살라딘의 통치 아래 들어갔으며(1187년) 1차 대전 후 영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1948년 이후 이스라엘의 영토로 남아 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고 가버나움으로 가시자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따라왔다고 적었다(요 6: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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