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도 십일조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종교적 규범이 불교경전에 있음을 아는 경우는 드물다.
비록 독실한 불자일지라도 회자되어 있지 않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 이전에도 십일조의 규범이 동양의 이방종교에까지
보통화 되었다는데 대한 의구심 같은 작용이 없잖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놀랄 것은 없다.
열 손가락의 계산법은 오늘날 컴퓨터 시대에도 생활주변에서 아쉬운 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수입의 전체를 10으로 잡고 거기서 배합하는 방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새로운 것이 못되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계산법으로 볼 수 있다. 2,500년전 석가모니도 이 계산법에 따라 10분법을 사용했을 확률이 크다.
불교 경전은 신자들의 소산을 다음과 같이 배분하도록 규범으로 정하고 있다.
제 3편 제 3장 제 4절 육방례 사(四)에서 "꿀벌처럼 애써 재산을 모으고 개미처럼 부지런히 재산을 모아
그 재산의 10분의 4는 포시(布施)를 하고 착한 친구와 사귀며, 10분의 2는 사업을 영위하고,
나머지는 쌓아 두었다가 불시의 재난에 대비하여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사상의 근기(根氣)로 육파나밀(六波羅密)이란 것이 있다.
1) 포시(布施) 2) 특계(特戒) 3) 인욕(忍辱) 4) 정진(精進) 5) 선정(禪定) 6) 지혜(智慧).
여기 포시는 수행 수칙 6 중에 첫째의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그 비중은 그 어느 것보다도 능가한다.
그것은 포시를 통해 왕생의 윤회를 멈추어 극락세계로 가게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때문에 불교에
있어서 구제(布施)는 선보(善報)의 근본으로 염라대왕의 명령도 무기력화 시키는 큰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십일조의 배분율을 살펴보면 포시가 당연 우위에 있다. 전체 수입을 10으로 보았을 때 4의 분량은 거의 반에 가깝다.
포시의 양을 이렇게 크게 잡은 것은 서상한 선행의 근본과 직결되는 문제니 만큼 부운(浮雲)같은 재물에 집착치 않고
타인을 구제하는 일에 쾌적함으로써 결과 자기에게 선덕(善德)이 돌아오도록 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행위 중 으뜸가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담겨있는 것으로서 결국 자기에게 구제(救濟)하는 결과가 된다.
불교의 십일조 내역을 보면 10분의 1을 생활비에 쓰고, 10분의 4는 포시(헌금)로 내고, 10분의 2는 사업비로,
나머지 10분의 3은 비상금으로 사용하도록 배분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이것이 석가 당시에는 적용이 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어도 현실성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구제(布施)를 보면 기독교의 경우 헌금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14조를 내도록 한 것은 우리의 십일조에 비해
너무나 현실을 무시한 지키기 어려운 고율(高率)이다.
또한 생활비로 10분의 1을 정한 것은 당시 상류사회의 부자나 토호 등에 적용이 될 규범이지 일반서민에게는 타당치가 않다.
가령, 금일의 실정을 놓고 보면 200만원 월급에 1/10인 20만원 가지고 생활하도록 규범을 세웠다면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적어도 월수가 2,000만원은 넘어야 하는데, 이 정도면 현대사회에서도 몇 명 아니 될 것이다.
불교의 구제는 이처럼 현실의 생활을 완전히 무시한 기조 위에 세운 것으로 타종교와는 많은 차이를 가진다.
이것은 내세를 위해 현세를 희생한 잘못된 인생관에 근거하고 있다. 당시 그들 교단의 형편은 초기 원시불교나 부파불교에까지 출가승(出家僧)이 압도하는 추세였다. 놀고 먹는 승려가 많다고 하는 것은 종단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나 반대로 재가승(在家僧)은 피땀 흘려 소득을 올려야 하고, 이들 출가승(出家僧)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이 있다.
그러니까 출가승(出家僧)의 증가는 재가승(在家僧)의 고통을 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 밖에 없다.
석가모니의 십일조는 당시의 침체된 교단을 활성화시키고 재가승(在家僧)에게는 보시가 왕생의 윤회를 끊는다는
대 희망을 던져주는 쪽으로 발전해 간 것이다.
여기에 석존이 4/10의 보시를 하도록 한 것은 출가승을 전적으로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무리
2,500년전 농경사회의 경우를 놓고 보면 소산의 1/10로써 생활비가 가능한 경우는 적어도 1,000석의 추수가 있어야 한다. 이 정도의 농사를 지으려면 인부가 30명 이상이 필요하다.
당시 인도사회에 년수가 1,000석 이상이 되려면 한 고을을 점령해야 가능하다.
불교의 신자가 되려면 이 정도의 수입은 되어야 석가의 법을 문자 그대로 지킬 수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십일조는 시의 고금이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진리로서 통하고
그 타당성은 불교의 십일조를 훨씬 능가한다.
짜임새가 있고 설득력이 있고 과학적이다. 가난한 사람도 충분히 지킬 수 있어서 보편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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