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선교의 시대적 상황
인천은 바로 감리교회의 모태가 시작되는 첫 시발점이었다. 특히 내리교회는 감리교선교사들의 첫 예배장소로 알려져 있다. 무지와 암흑의 땅, 사색당쟁과 쇄국정책의 우환에 겹친 구한말은 절망의 시대였다. 선진제국들의 강압적 개방과 통 상정책은 한국의 미래를 암울하게 하였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정치적 다툼과 왕실내의 혼란 등으로 국내외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가까운 청나라(중국)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어지러웠으며, 일본은 왕정 복구와 문호개방 그리고 메이지(明治)유신으로 국력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우리 나라 역시 미국과 수교(1883년)를 하여 공사가 서울에 주재하였다.
1884년 6월 24일 일본주재 맥클레이 박사(Dr. R. Maclay)는 일본의 감리교 초대선교사로써 아오야마(靑山) 학원을 설립하였으며, 교육과 선교를 효율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미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한국을 방문하여 고종황제에게서 의료와 교육사업에 대한 윤허를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미국감리교 해외선교부는 의료선교사 스크랜톤(W. B. Scranton, M.D) 가족과 아펜젤러 목사(Rev. H. G. Appenzeller) 내외를 한국에 파송하였다. 기독교 선교를 위하여 개신교 목사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한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미지의 땅으로 복음을 안고 찾아왔다.
2. 아펜젤러의 학창시절과 선교에의 소명
헨리 게하트 아펜젤러(H. G. Appenzeller)는 1858년 2월6일 펜실베니아의 서더톤(souderton)이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기드온과 독일계 메노나이트파 신자인 모친 마리아의 둘째아들로 어린 시절은 주로 농장에서 보냈다. 그의 조상은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그의 이름은 스위스의 칸톤스(cantons)의 한 계곡이름인 appenzell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는 독일계 루터교회에서 복음적인 위엄과 엄격함을 배우며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 정신으로 14살에 이미 세례를 자원하여 받았으며, 18세(1876년 10월6일) 때에 중생을 체험하였다.
아펜젤러는 웨스트체스터 고등(사범)학교를 다닐 때 한 특별집회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은총과 감격을 느끼게 되어 선교를 위한 헌신을 다졌다. 그는 이 학교에서 기도회를 조직했는데 나중에 이는 웨스트체스터의 기독교청년회(YMCA)가 되었다. 20세 되던 1878년 가을 필라델피아 서부의 Lancaster에 있는 프랭클린 앤 마샬 대학(Franklin And Mashall College)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연구하였으며, 여러 언어에 많은 관심을 가져 어학에 능통하였다. 그는 Lancaster 제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회에 참석하고 속회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생명력 있는 작은 모임의 신앙고백과 종교적 체험의 생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대학시절 그는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였으며, 그는 감리회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뒤 선교사업에 헌신하기 위하여 드류대학의 신학교(Drew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 그는 숭고한 성직에 몸담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품과 학업에 열중하여 드류의 신학적 학풍을 토론하고, 학교에서 명예로운 직위을 맡았으며, 교회 일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3. 아펜젤러의 한국선교
한국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이 섭리는 아펜젤러 목사를 선교사로 준비하였으며, 가우처 박사는 한국선교를 위한 첫 만남은 한국 사절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아가 맥클레이 박사는 이러한 실무를 도맡음으로써 한국에 대한 미감리교회의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미 초대공사 푸트(Lucius H . Foote)의 입국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위시한 홍영식, 서광범 등의 사절단이 일본을 거쳐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워싱톤 행 기차 안에서 가우처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한국사절단을 초청하여 선교를 위한 상황을 파악하여 감리교 기관지에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으며,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선교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1883년 총선교위원회에서 한국선교를 정식으로 결정하여 일본주재 선교사인 맥클레이 박사에 의해 선교답사를 하게 하였다.
맥클레이 목사는 디킨슨 대학을 졸업하여 감리교 목사가 되었으며, 중국선교사와 일본선교사로써 크게 활동하였다. 그러한 그가 또다시 한국을 위한 선교의 첫장을 열게 되어 참으로 큰 기쁨을 받고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감사하였다. 그 당시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완화되고 있었으며, 이미 일본에서 만났던 김옥균이 승정원의 승지로써 외교업무를 보고 있었으며, 그에게 부탁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였는데 김옥균 역시 한국의 개화에는 개신교의 활동이 최선의 길임을 인식하여 환영하였다. 이를 통해 의료와 교육 사업을 위한 윤허를 받게 된 것이었다.(1884. 7. 3.)
이러한 시기에 1884년 12월 아펜젤러는 도지(E. J. Dodge)양과 결혼하였으며, 드류신학교를 1885년 1월에 졸업하였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고 스크랜톤 박사 가족과 함께 한국선교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제 1회 한국선교사회를 열고 맥클레이 박사를 총책임자로 아펜젤러는 부책임자가 되었다.
1885년 4월5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기도하기를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2개월간 동경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6월 20일에 재입국하였다. 그는 17년동안 한국인들 사이에서 선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이화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선교 및 목회에 열중하였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학생으로 시작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명을 하사 받았다. 배재학당은 남학생들을 전용으로 가르쳤으며, 과정은 예비과정부, 교양과정부, 대학과정부를 두었으며, 영어, 중국고전, 서구의 과학과 문학 등을 공부했다. 이화학당에서는 스크랜튼 부인의 주도로 주로 고아나 과부와 같은 소외 계층으로부터 시작하여 교육선교를 시작하였고 여성의 지위향상과 복음사역에 충실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학교였다. 스크랜튼은 알렌이 경영하던 제중원에서 잠시 일하다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봉사에 힘을 써 고종은 그의 희생적 봉사를 기려 시병원(施病院)이란 칭호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는 1888년에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文)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중?영의 삼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여기에서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 특히 격주간지 [교회](1889년 5월)의 발간으로 신앙의 교제와 소식을 나누었고, 영문 월간지 Korean Re- pository(1892년 1월)는 폐쇄적인 한국사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5권까지 발행되었으며,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 되어있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 [교회]지를 확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협성회보도 발간하였다. 1889년 교리서인 [미이미 교회강례]와 [성교촬요]를 발행했으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 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및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단지 선교 및 교육 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4. 아펜젤러 - 행동하는 신앙
아펜젤러는 학교의 설립자였고, 한국 감리교 선교회의 감리사였으며, 종교신문의 편집자였고, 출판사와 서점의 운영자이면서 영국 왕립협회 아시아지부 도서관의 사서, 외국인 묘지협회의 회계로써 보다 훌륭한 인간을 만드는 일과 한국의 복음선교 사역을 위해 충실한 목회자였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요, 자상한 아버지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자녀를 양육하려고 노력한 신사였다.
아펜젤러 목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제물포(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선상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한 광산 기술자의 목격담에 의하면 1902년 6월11일,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눈 뒤 아펜젤러는 방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군산 앞바다에 이르러 이때 갑작스런 짙은 안개로 인해 선박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비서와 어린 소녀들을 먼저 인도하고 함께 나가려고 하였으나 이미 늦어 배와 함께 순교하고 만 것이다.
아펜젤러는 하나님과 감리교회에 대하여 충성스러웠고 교리와 법을 준행했다. 교회의 지도자를 존중하였고, 교회의 발전과 봉사에 전념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말하는 복음적 기독교의 진리와 정신, 체제와 정책을 한국인에게 전해주었으며, 그가 교회에 충성하였던 것처럼 친구와 조국, 그리고 모든 선한 사업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의 전달자 역할뿐만 아니라 암흑과 무지, 빈곤과 무질서, 미신과 부패를 타파하고 한국의 근대화와 자립정신을 일깨워주고 끝내는 함께 가던 한국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한국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으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설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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